1857년 6월 리처드 버튼(Richard Francis Burton, 1821~1890)과 존 스피크(John Hanning Speke, 1827~1864)는 아프리카 동부의 잔지바르에서 약 130명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나일강의 원천을 찾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 그들은 노예 교역로를 따라서 9개월 만에 약 1,600km의 내륙의 탕가니카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그 사이 필요한 장비의 대부분을 잃고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각종 풍토병에 걸렸고, 탐험 주동자였던 버튼이 병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스피크가 북쪽의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했으나 나일강의 원천을 찾는 추가 탐험은 하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 먼저 돌아온 스피크는 자신이 두 호수를 발견했으며 버튼의 긴 투병으로 사실상 탐험대장 역할을 했다고 주장해 유명 인사가 됐고, 뒤늦게 영국에 도착한 버튼이 반론을 제기하며 싸움이 일어났다. 이후 스피크는 1864년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하고, 버튼은 더 이상 탐험대를 맡지 못한 채 한직을 전전하다 실의에 빠져 생을 마감해 두 사람 모두 이 싸움의 패자가 된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인과가 뚜렷하다. 아랍어와 스와힐리어에 능통했던 버튼은 풍부한 현지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결정을 내렸지만 그 내용과 배경을 스피크에게 설명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또한 체력이 좋고 지도 작성과 측량에 능한 스피크의 강점을 활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버튼의 제안으로 탐사에 참여한 스피크는 탐험 방향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적절한 설명을 듣지도 못했기에 두 사람은 탐험 중 감정이 격해져 서로 총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으로 끝났으나 버튼은 스피크가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상사로서 리처드 버튼은 어떤 행동을 해야 했을까? 목표를 정하는 과정에 스피크를 개입시키고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끝까지 들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스피크의 강점을 살려 탐험의 실행 부분은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탐험대의 사기진작, 보급, 주변 부족과의 우호관계에 주력하는 등 적절한 역할 분담을 했다면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부하들이 고생할 때 사과하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보다 매일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았을까? 리더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고, 목표와 역할을 명확히 하며 시야를 넓혔다면 버튼은 자신이 겪고 있던 엄청난 스트레스와 갈등 상황을 좀 더 잘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일 15분 정도만 투자해 자기성찰의 시간으로 활용했다면 탐험은 다르게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 칼럼에 대한 회신은 sskimpt@gmail.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