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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은 대부분 ‘나는 이렇게 들었다(여시아문, 如是我聞)‘로 시작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나는 부처님에게 이렇게 들었다’이다. 이 둘의 차이가 뭘까?


부서장 회의를 마치고 각자의 부서로 돌아가서, 회의 내용을 전달하는 내용을 보면, 각자 부서의 입장에 따라서 전달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도저히 같은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 신념 등 자신의 필터로 듣는다. 누가 어떤 말을 했든지, 자신의 필터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이 필터가 다르면 듣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현들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선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훗설은 자신의 경험에 의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했고(에포케epoche, 판단중지), 장자는 마음을 굶겨야 한다(심재, 心齋, 마음을 목욕재계하듯 하나로 모으는 것)고 했다. 또한,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판단을 하지 않으면 된다. 좋아하고 싫어함을 쫓지 않으면, 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알아차림(awareness)’이다. 자신의 생각(perception)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인지하는 것(cognition)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판단하는 것(judge)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느끼는 것(feeling)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감정(emotion) 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저 사람의 감정이 격해졌다.’가 아니라 ‘저 사람의 감정이 격해졌다고, 내가 알아차린다.’ ‘저 사람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내가 알아차린다.’ ‘내가 화가 났다’가 아니라,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내가 기쁘다’가 아니라, ‘내가 기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우리들을 ‘확신의 덧’ ‘생각의 감옥’ ‘판단의 지옥’ 등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이러한 알아차림이 바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경청이다. 국제코칭연맹에선 경청을 코치의 핵심역량이라 규정한다.


‘판단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건, 이미 ‘판단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판단을 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의 생각은 여러 가지 추론을 통해 생각을 확장해 나가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의 특질이 있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반면에, 인간에겐 진실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원성실성(圓成實性)’도 있기 때문에, 이런 판단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다만, 이런 알아차림을 잘할 수 있으려면 능력을 길러야 한다.


하루에도 오만가지씩 일어나는 생각에 대해,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을 하는 건 엄청난 능력이다. 아마 기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감수성 훈련과 명상 등의 노력을 통해 알아차림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경전이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 것의 의미가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뜻이라는 게 잘 전달되었을지, 살짝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iamcoach@naver.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