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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도 너처럼 반도체 회사에 입사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내 잔에 소주를 따르며 친구가 물었다. 말은 의문문이지만 취한 그의 눈은 내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는 나의 ‘운발’을 부러워하는 듯했다. 그와 나는 대학 일 학년 때 친구가 되었다. 3~4개 회사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정도로 취업이 쉬웠던 시절, 반도체 분야는 생소하고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분야였던 4학년 2학기에 그는 제법 이름있는 대기업의 계열사 중 하나인 섬유 회사 기술자로 입사를 결정했다. 친구들은 졸업하기 전부터 월급을 받는 그를 부러워했고, 입사 후에는 빠르게 승진해 늘 자신감이 넘치던 그였다. 그러나 외환 위기와 이어지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는 동안 전통적인 사업에 집중하던 회사들은 문을 닫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임원으로 책임을 다하던 친구도 회사를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몇 년 동안 소식을 끊고 살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년 전 그가 작은 화공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런 그가 몇 달 전 퇴직을 했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갖고 있는 능력은 비슷하거나 조금 부족하지만 좋은 기회나 환경을 만난 덕에 인정도 받고 경제적인 보상을 누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 배경에는 실제 우리가 모르는 역량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차이를 ‘운발’이라고 치부했다. 이런 태도는 때론 그들을 부러워하는 나를 위안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는 내 나름의 겸손한 표현 방법이 되었다. 회사에서 사업전략을 만들 때 그 전략이 제대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요소를 인에이블러(Enabler)라고 한다. 이는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에게도 필요한 역량과 태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환경적 요소 역시 필요하다. 이때 인에이블러는 동기를 유지하고 장애물을 제거해 주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원한다. 조직에서 제공하는 교육, 보상 체계와 같은 지원에서부터 업무 프로세스나 규범 같은 조직 문화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들이 포함되며, 개인이 혼자서 만들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장이나 인사 담당 중역이 특별 보너스나 복지제도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지속되기도 어려우며, 비협조적인 동료의 태도나 태만, 업무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자원의 지원도 무시할 수 없는 인에이블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목표를 향해 동기를 잃지 않게 만드는 강력한 목적도 영향을 준다. 조직의 인에이블러를 즐기기만 하고 기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구성원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조직이 오랜 시간 함께 만들어 놓은 유산(Legacy)이다. 그것을 자신의 역량이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받는 거래적인 관계로 일한다면 조직은 힘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에이블러는 모든 구성원들이 지속 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내 앞에 보이는 것을 넘어 인에이블러에 영향을 주는 더 큰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조직이 속한 산업이나 국가의 흥망성쇠 그리고 그것에 미치는 세계적인 변화들이 모두 해당된다. 지구 환경이나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함께 고민하고 기여하며 성장시켜야 한다. 친구의 말에 내 운발을 복기하다 보니 나는 그동안 인에이블러를 ‘운발’이라고 퉁 치고 살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인에이블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발전시켜 널리 운발을 받는다면 성공 기회는 한결 많아지지 않을까? * 칼럼에 대한 회신은 jongkim1230@gmail.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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