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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국가대표 선수 손흥민-이강인 선수 사건이 한바탕 대한민국을 달궜다. 지금도 이강인 선수의 월드컵 예선 팀 발탁으로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언론에 보도된 사건의 골자는 이렇다. ‘주장인 손흥민 선수가 아시안게임 요르단 결전을 앞두고 선수 단합 차 전원 식사를 함께 하려고 했다. 일찍 식사를 마친 소장파 이강인 선수가 탁구를 치기 위해 자리를 뜨겠다며 반발, 육탄전을 벌였다.’ 혹자는 이를 세대갈등, 또는 해외파 vs 국내파 갈등, 하극상 등 다양하게 해석한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입장에서 무조건 상대 선수를 맹공하기도, 젊은 선수들 혈기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고도 한다.


어느 경우든 일치하는 것은 클린스만 전 감독에 대한 비판이다. 패배 자체보다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한다. 비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선수들의 갈등을 방치했다는 것이고, 둘째, 경기 패배의 원인을 선수들에게 돌렸다는 점이다. 문제의 원인은 손-이 선수나 탁구가 아니라 클린스만 감독이란 점에서 ‘클린스만 사건’이란 명칭이 더 적합해 보인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리더분들도 클린스만 감독에 대해 부글부글 끓으며 비난의 불화살을 퍼부었을 것이다. 만일 이 사건을 현재 우리 조직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과연 리더로서 우리는 클린스만 감독 같은 태도를 취한 적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방임’을 ‘자율’이라고 하며 성과가 나지 않았을 때 “내 잘못이 아니야”라며 한발 빼는(고 싶은) 적은 없었는가.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리더십 교훈은 무엇일까.


축구와 일반 기업조직은 다르다고? 구체적으로 대입해 보자. 중요한 고객사 미팅을 앞두고 시니어 팀원과 주니어 팀원이 갈등을 빚어 대판 싸움을 했다면? 모른 척할 것인가. 자초지종 논리로 시시비비 판정할 것인가, 시니어에게 ‘선배로서 품으라’고 할 것인가. 주니어를 ‘후배니 참으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대사(大事)인 고객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으니 조용히 넘기자고 달랠 것인가. 상황과 조직 특성에 따라 정답은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용할 가이드라인 유무이다. 무게와 길이를 재는 단위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저울이든 자든 측량 도구조차 없어선 곤란하다.


영국의 행복경영 전도사인 헨리 스튜어트는 저서 〈해피 매니페스토〉 (2020)에서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완전한 자유 역시 바라지 않는다’며 ‘직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싶어 하면서도 (결정을 내리는) 가이드라인도 동시에 원한다’고 말한다. 업무 수행을 자유 수행할 선택지를 주고 조사한 결과, 명확한 가이드라인 내에서의 자유가 89%로 압도적인 반면,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경우는 7%, 관리와 지시 요청은 4%였다. 얼마 전 국내 모기업에서 경영진 내부 갈등으로 가열찬 폭로전이 벌어졌을 때 사태를 수습한 것은 시시비비의 엄정한 논리도, 자초지종의 구구한 설명이 아니었다. ‘100 대 0의 사내 원칙’ 한 줄의 힘이었다. 여기서 100이란 내부에선 모든 정보를 공유하되, 0, 외부에는 절대 보안을 유지한다는 의미다.


원칙과 가이드라인 없이 ‘알아서 하라’는 것은 자율이 아니라 방임이다. 넷플릭스가 ‘규칙 없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원칙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성과 포용성의 전제는 공통 목표와 공통 가치다. 클린스만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이참에 우리 조직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는가.


-Purpose: 우리의 공동 목적은 무엇인가.

-Person: 우리의 이해관계자는 누구이며 그들이 우리 팀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Principle: 그 목적을 함께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원칙이 필요할까?

* 칼럼에 대한 회신은 blizzard88@naver.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