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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나를 만만하게 본 것이다.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이면지에 낙서하며 잠시 나와 놀아준 것도 아마 나에 대한 작은 배려였을 것이다.


“하삐, 나 뽀로로 볼래요.” 드디어 본론을 말한다.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를 노리고 내게 온 것이다. 34개월 된 손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미안한 듯 쑥스러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친다. “두 개만 볼게요.” 작은 손가락을 펴 보인다.


나는 종종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손자와 놀아준다. 딸은 손자가 TV 보는 것에 민감하다. 딸은 TV 보는 것이 두뇌 발달을 더디게 하고, 책 읽기나 퍼즐 맞추기 같은 그녀가 기대하는 바람직한(?) 놀이를 하지 않는 원인으로 여긴다.


반면에 나와 아내는 웬만하면 손자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 젓가락질이 서툴러 손으로 반찬을 집어먹어도, 밥보다 TV를 좋아해도 그런 손주가 커서도 공부하지 않거나 남을 배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은 손자가 좋아하는 것을 눈치껏 도와준다. 딸은 이런 우리 태도를 못마땅해한다.


어느 사이 커서 부모가 된 딸을 바라보며 우리가 딸을 키우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강했던 것 같다. 아이를 모범생으로 키우려는 욕구가 강했다. 아이가 실수하거나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을 나의 실패로 여겼다. 모두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실패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고 내 체면을 더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아이의 생각, 욕구와 감정을 무시하고 의지를 꺾거나 부모가 뭔가 가르쳐주고 채워 줘야 하는 부족한 아이로 여겼다. 내 기준과 판단으로 아이를 가둔 것이다. 그땐 부모로서 ‘에고’가 강했다.


부모의 그런 노력이 아이의 성공에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나이를 더 먹은 후다. 코칭을 배운 후 더욱 그 생각에 확신이 더해졌다. 코칭을 배우면서 자주 듣는 말이 코치의 ‘에고’다. 코치가 자신의 판단이나 신념으로 고객에게 코치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설 때 에고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코치의 에고는 고객에 대한 탐구를 멈추게 한다. 고객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성장과 실행 의지를 방해한다. 에고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코칭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고객의 문제 해결을 코치의 책임으로 여길 때다. 코치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어 할 수 있지만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은 아니다. 고객이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는 과정을 함께 하는 사람이다. 에고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부담감을 버리고 고객을 믿고 함께 탐구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두 개만 보고 할비랑 목욕할 수 있어? 할비는 목욕하고 싶은데.”
“네!”


큰 소리로 힘차게 대답한다.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에서 뽀로로를 찾아 보여준다. 네 편을 넘게 보고 있다.


“인제 그만 봐야지. 할비는 목욕하고 싶어.”
“아니 싫어. 하나만 더 보고.”
“그래, 할비 기다릴게.”


한 편을 더 보더니, 모니터 뚜껑을 스스로 닫으며 한마디 한다. “짠! 내가 목욕시켜줄게.”


처음에 울면서 거부하던 목욕이 지금은 서로 머리를 감겨주는 놀이가 됐다. 손자는 승자의 미소를 짓는다. 그는 나를 목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 틀림없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jongkim1230@gmail.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