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요즘 참 좋다. 친한 친구들이 퇴직을 해서 좋다. 같이 놀 수 있어 좋다. 친한 친구지만 같이 여행을 가지도 못하고 무언가 같이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가끔 골프를 치는 것이 큰 호사였다. 친구들 퇴직 후 난생 처음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연초에는 부부동반으로 일본 여행을 갔고 얼마 전에는 삼척으로 놀러 갔다. 주원이 부부도 마침 같은 동네로 놀러 왔는데 따로 다니다 아침 식사 때 같이 하기로 했는데 커뮤니케이션 잘못으로 한 친구 부부와 주원이네만 같이 식사를 하게 됐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친구들은 딴 데서 식사를 했다. 두 군데서 나눠서 식사한 후 같이 모였는데 주원이와 같이 식사를 한 친구 부인이 얼굴이 훤해서 들어왔다. 주원이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싱글벙글 얘기를 한다. “정말 오늘 아침 주원이 덕분에 호사를 누렸어요. 처음 봤는데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요. 엄마 등 뒤에서 깍꿍을 하면서 놀고 제게도 안기고 같이 사진도 찍고. 정말 천국에서 놀다 온 기분이에요. 우리 부부가 주원이를 독차지 할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또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어쩌지요?”라고 말을 한다. 짧은 시간 내 주원이는 친구 부부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어제는 스케줄이 많아 힘든 하루였다. 새벽 판교에 있는 회사에서 강연을 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해에서 일하던 지인을 만나 점심을 하고 오후에는 다시 평택에서 코칭을 했다. 파김치가 되어 귀가를 했는데 안에서 주원이 소리가 들린다. 문득 주원이네 아파트에 물이 나오지 않아 이모님이 주원이를 데리고 집에 올 수 있다는 아내 말이 떠올랐다. 너무 반가웠다. 내가 나타나자 주원이도 반색을 한다. 예상치 못한 할아버지 등장에 입이 반쯤 열린 쑥스럽지만 너무 기쁜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그대로 내게 달려와 안기는데 난 가방을 맨 체 주원이를 안았다. 둘이 볼을 비비고 주원이는 침이 잔뜩 묻은 입을 벌리고 내게 입을 맞춘다. 세상에 이게 웬 횡재냐? 이어 아내도 들어왔고 난 주원이와 목욕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주원이 목욕도 시켜야 하고, 나도 샤워를 해야 하니까 잘 된 일이다. 주원이가 집에 오면 주원이 목욕은 내 담당이다. 우리 집의 오래된 전통이다. 애들은 물을 좋아하고 나 역시 애들과 목욕하는 걸 좋아한다. 탕 안에 들어가면 주원이는 나름의 리추얼이 있다. 우선 칫솔에 치약을 묻히는데 내 목표는 주원이 이빨을 닦는 것이고 주원이 목표는 치약을 먹는 것이다. 서너 번은 줘야 행사가 끝난다. 다음은 샴푸로 머리를 감는데 주원이는 계속 샴푸를 줄 것을 요구한다. 거품으로 만들어진 샴푸인데 이것도 몇 번은 해야 끝이 난다. 수도꼭지를 내렸다 올렸다 하고, 장난감 동물들을 갖고 놀기도 한다. 대충 20분 정도 하는 것 같다. 주원이와 목욕탕에서 놀다 보니 피곤이 확 풀린다.

저녁 때 공부 갔던 딸이 돌아오자 주원이는 엄청 반색을 한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 딸을 쉬게 하려고 아내는 나보고 주원이 밥을 먹이란다. 대충 나도 밥을 먹으면서 주원이 밥을 먹인다. 얼마나 잘 먹는지 모른다. 주원이는 한번도 먹는 걸 마다한 적이 없다. 아내가 설거지 하는 동안 난 주원이를 데리고 내 서재에 들어간다. 주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갖고 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내 서재 창 앞에는 벚꽃이 활짝 피워 마치 무릉도원 같다. 책상에서 이것저것 만지던 주원이가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쉬는 흉내를 낸다. 요즘 새로 생긴 주특기 중 하나다. 안전을 위해 주원이를 뒤에서 안고 주원이는 바깥공기를 즐긴다. 그때 내가 좋아하는 이문세의 “그때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란 음악이 나온다. “내 마음이 흐르는 곳에 진실이 닿은 그 곳에, 내가 먼저 있을게, 내 사랑이 닿는 그곳에, 두 눈이 머무는 곳에, 항상 내가 있을게” 가사가 가슴을 흔든다. 문득 목에서 뭔가 뭉클한 것이 올라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난 요즘 자주 감동을 하고 눈물도 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습관이다. 행복에 겨운 시간이다. 주원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하지만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이런 주원이와 헤어져야 한다. 그런 사실이 슬프다.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주원이 앞에는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그는 나를 기억할까? 만약 기억한다면 나를 어떤 할아버지로 기억할까? 내게 주원이는 등불 같은 사랑이다. 그도 나를 사랑하는 건 분명하다. 다만 주원이는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나는 이를 글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아~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칼럼에 대한 회신은 kthan@assist.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