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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맞아 주원이가 왔다. 평일에는 자기 집에 있다 금요일 저녁에 와서 월요일 아침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다 간다. 부부 둘이 애를 보는 것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서로에게 유리하다. 애들도 편하지만 우리 부부가 그만큼 주원이를 보고 싶어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시집간 막내도 주말마다 주원이를 보러 온다. 며칠 만에 봤는데 주원이가 부쩍 큰 거 같다. 무게도 더 나가고 얼굴도 더 또렷하다. 얼마나 잘 웃고 옹아리를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은 밤마다 찡찡대고 자긴 전에는 칭얼대면서 자기 엄마를 힘들게 하지만 아침이면 다른 사람이 된다. 매일 애한테 시달려 힘들만도 한데 딸애는 자기 애가 예뻐 죽는 것 같다. 애가 그렇게 예쁘냐고 물었더니 “정말 애는 낳아봐야 할 것 같아. 애가 예쁠 걸로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어. 밤에 조금 힘들게는 하지만 아침에 방긋방긋 나를 보고 웃고 옹아리를 하면 힘들다는 생각은 완전 사라져.”라고 답한다. 자기 애를 사랑하는 건 본능이라 하나도 이상할 게 없지만 아는 것과 실제 이를 경험하는 건 다른 것 같다. 주말인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 아내에게 온갖 소리를 해댄다. 아내도 비슷한 수준이 되어 뭐라고 끊임없이 애와 수다를 떤다. 평소 이성적인 아내가 주원이와 있으면 조금 모자란 사람으로 바뀐다.

아내는 최근 할머니 육아 교육을 다녀왔다. 구연동화 하는 법, 마사지 하는 법, 목욕시키는 법 등 제법 많은 공부를 해왔다. 무엇보다 격대교육이란 낯선 단어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격대교육은 한 대를 건넌 할아버지 할머니 교육이란 말이다. 친부모로부터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대를 건넌 조부모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단 것이다. 그럴 듯 했다. 내 앞에서 배운 까꿍놀이도 하고 애들 노래도 한 곡 알려주었다. 격대교육 얘기를 들으니 오래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다. 수원에서 농사를 지으셨던 할아버지와 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몇 달씩 외갓집에서 있었는데 늘 사랑방에서 외할아버지와 같이 먹고 같이 잠을 잤다. 새벽마다 일어나 쇠죽을 쑤러 나가시던 외할아버지 모습이 생생하다. 기침 소리, 가래 뱉는 소리, 험하게 잠을 자던 내게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그놈 참 잠도 험하게 자네”라며 혀를 차며 하던 얘기, 밤에 변소에 갈 때마다 앞에서 나를 지켜주시던 그 모습, 어디를 갈 때도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한번은 꼴미 (꽃뫼)란 동네에 마실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외할아버지 등에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정신이 들었는데 그 등이 그렇게 따뜻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절대적인 나의 지지자였다. 다른 사람들이 버릇 나빠진다고 뭐라고 해도 개의치 않으셨다. 고 1때 돌아가셨는데 자기 큰 사위가 나온 경복에 내가 들어간 것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셨다.

오늘은 원래 골프약속이 있었다. 근데 친구 하나가 상을 당해 자연적으로 한 명이 비면서 어떻게 할지 설왕설래 하다 결국 안 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골프를 좋아하긴 하지만 골프취소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날씨가 춥다는 것도 이유지만 하루 종일 주원이와 놀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다. 새벽부터 밖에서 아내가 주원이랑 노는 소리가 들린다. 난 할 일이 있어 적극 참여를 못했는데 오전 10시쯤 아내가 젖을 먹인 후 주원이를 내게 데리고 왔다. 조금 졸릴 것 같으니 재우라는 마나님의 분부였다. 근데 잘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눈이 말똥말똥하다. 뭔 궁금한 게 그리 많은지 고개를 전후좌우로 돌리는 바람에 안고 있기도 힘들다. 서재에 데리고 들어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무릎에 앉혀 놓았다. 가만히 있던 주원이가 히사이시 조의 섬머라는 음악을 듣는데 갑자기 웃으면서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제 딴에 맘에 든 모양이다. 어느 순간 싫증이 난 것 같아 안아줬다.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작은 손을 잡아본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 온 마음과 영혼이 맑아진다. 내가 주원이를 안고 있는지 주원이가 나를 안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떤 할아버지가 되고 싶을까? 이 담에 세월이 흐른 후 주원이는 나를 어떤 할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을까? 행복은 좋은 관계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주원이를 안고 있으면 그 말이 진리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손자 덕분에 바보할아버지가 되어 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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