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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에서 MBA 공부를 할 때다. 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꼭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소개하게 했다. 그래서 나도 고향 제주도를 소개했다. 궁금해서 나중에 교수님께 물어보았다. 교수님은 한국에 와 본 적도 없고 한국 지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그런 분에게 한국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교수님은 고향은 그 사람을 아는 데 무척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제주도라는 한반도 남쪽 섬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다는 사실은 당신에 대해 많은 걸 말해 준다는 거다. 음. 그러고 보니 제주의 풍토와 언어, 관습들이 얼마나 나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겠는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고향의 내러티브
나는 작가들의 고향에는 관심이 많았다. 최인호 소설의 도회적 감수성과 대중성은 그가 서울 출신이란 것과 들어맞고, 정지용의 시는 그의 고향 옥천을 떠올리게 한다. 김유정의 <봄봄>에 나오는 순박하고도 해학적인 장면들은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이라는 풍토에 뿌리가 있을 것 같다. 알베르 까뮈가 알제리 출신임을 빼놓고서는 소설 <이방인>과 부조리에 대한 철학을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특히 작가의 일이란 바로 언어를 다루는 것이기에 고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매끈하게 서울 말을 잘 쓰던 사람들도 고향에 가면 사투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스러운 정체성의 발현이다. 사투리가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던 제주의 어느 중학교는 사투리 경연대회를 연다. 학생들이 할머니에게 수집해와서 구수하게 쏟아내는 상상 초월 사투리 대잔치에 웃다 뒤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선생님들이라고 한다.
언어에는 내러티브가 따른다. 지역마다 전형적인 스토리들이 생산되고 반복되고 되물림 되는 거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돈도 없으면서 폼 잡느라 흥청망청 쓰다가 패가망신하는’스토리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결국 ‘조냥(절약)해야 한다’는 ‘기승전조냥’의 내러티브가 이 친척, 저 이웃의 사연으로 버전만 다르게 참 많았다. 아마 제주가 척박해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글로벌 시대, 온라인 세대의 고향
젊은 세대들에겐 고향의 의미가 다르다. 한 친구는 고향을 물었더니 재개발로 없어졌다고 대답한다. 글로벌화는 어떨까? 물론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로컬의 정체성이 필요 없어지거나 덜 중요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로컬들 속에 있는 보편성에 주목할 때 그것이야말로 글로벌의 문법이 된다. 그게 헬싱키의 한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고향을 설명하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젠 로컬-글로벌이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디지털 유목민들의 시대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상에서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연출할 수 있고, 어느 게 진짜 자신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것도 약과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발달하는 시대에, 사람들에게 고향과 정체성이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나도 학기초에 대학원생들을 만나면 소개 시간에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을 소개하게 한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려고 한다. 딱딱한 학력이나 경력의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의 유년시절과 성장기 모습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개별성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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