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의 행복 어렸을 적 나는 뭐든 읽는 걸 좋아했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은 물론이고 집에 구독되던 문예지 <현대문학>이나 <문학사상>도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거기 연재되던 시절이다. 멋지고 패기 넘치던 이어령 전집도 흥미진진했고, 어느 집에나 대개 한 질씩 들여놓았던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전집도 읽었다. 심지어 <새 농민>이라는 농협 월간지도 매달 읽었다. 재미없는 잡지였지만 찾아보면 꽁트나 계몽 만화처럼 조금 재미있는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다. 활자 자료가 부족한 때라 그랬는지 모른다. <삼국지(三國志)>는 2단 세로쓰기 편집에 깨알 같은 글씨였고 엄청 두꺼웠는데, 총 3권짜리였던가, 푹 빠져서 세 번을 읽었다. 4남매의 막내였던 터라 언니 오빠들이 읽던 사뭇 성숙한 소설들도 늘 가까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콜렉터>를 읽을 정도로 나는 조숙한 독자였다. 한 번은 일본 작가가 쓴 <부부(夫婦)>를 읽고 있었는데 제목을 수상히 여긴 아버지가 가져와 보라고 하시더니 내용을 보고 대경실색, 책을 다 갖다 버리라고 엄청 화를 내셨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이 불건전한 19금 소설을 보고 있다고 깜짝 놀라셨던 거다. 우리 집에서 일어난 조그만 분서갱유(焚書坑儒)! 커가면서는 박완서, 조정래, 황석영, 박범신 같은 작가를 좋아했다. 나중에 소설가가 되어볼까 하는 막연한 꿈도 있었는데,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를 읽었을 때, “아 나는 안 되겠구나…” 하고 포기했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저런 글은 쓸 수 없을 거라는 게 저절로 알아졌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이렇게 훌륭한 작가들이 있는데, 뭐 하러 재능 없는 나까지 나서서 스트레스 받으며 살겠는가. 그냥 행복한 독자로 머물러서 좋은 책을 즐기면 될 일이었다. 신경숙, 은희경, 김형경, 한강 등이, 또 김영하, 윤대녕, 박민규, 김연수 등이 잘 쓴 작품을 읽으면 감동을 받음과 더불어, 독자로 남기로 한 내 생각이 정말 옳았음을 상기하곤 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정말 좋은 글을 대하는 순간,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살짝 스쳐 지나간다. 행복과 충만의 차이 되도 않는 작가로 나서지 않고 행복한 독자로 남길 잘했다는 생각, 실은 그게 나를 달래는 말이라는 걸 내 가슴은 안다. 행복(happiness)과 충만감(fulfillment)은 다르다. 행복이 주관적인 만족감이라면, 충만감은 고생하면서도 느끼는 것이다. 고군분투하면서도 목적에 충실할 때 오는 내면의 평온함, 살아있는 느낌. 그게 충만이다. 그래서 행복한 독자의 반대말은 불행한 작가가 아니라 충만한 작가일 것이다. 재능 있는 디자이너이자 기획자인 조수용 대표가 어느 자리에서, 세상 모든 직업은 세 종류라고 말했다. 근로자(worker) 창조가(creator) 투자가(investor). 함께 식사하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따져보기 시작했다. 나는 뭐지? 월급을 받으니 근로자? 가끔 글이나 책도 쓰니 창조가? 소액 주식 투자 좀 하는데 그럼 투자간가? 하하하… 다른 한 사람이, 처음엔 누구나 근로자로 시작했다가 경력이 쌓여 전문가가 되면 창조를 하고, 그러다 은퇴하면 투자자로 살아간다는, 라이프사이클적인 관점으로 풀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으로 남았다. 독자와 작가의 중간 지대에 있는 북 리뷰어 요즘 내 일 중 하나는 SERI CEO에서 책을 소개하는 것이다. 경제경영 분야 신간을 골라 내용을 소개하는 북 리뷰어다. 북 리뷰 일을 십년도 넘게 해온 베테랑 한근태 선배가, 이 일은 무엇보다 스스로 공부가 되어 너무 좋다며 추천해 주었는데, 과연 그랬다. 매 달 두 권의 신간을 고르고, 요약하고 소개하는 일은 한번 할 때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지만, 꾸준히 쌓이니 축적의 효과가 상당했다. 한 3년쯤 되니 그 다음부터 나오는 신간들은 지난 3년간 소개한 책 중 어느 부분과 다 연결되어 있었다. 일이 더 재미있고 풍부해지면서 동시에 수월해졌다. 북 리뷰 일은 작가와 독자, 둘을 연결해주는 매개자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순수 창조에 비하면 근로에 가깝지만, 수동적인 독자에 비하면 2차 컨텐츠를 생산하는 창조의 측면도 있다. 그래서 중간지대다. 중간지대에서 글을 쓰면서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끝까지 읽어주면 그것만으로 황송하다. 뛰어난 작가는 못 되었지만 다행히 생태계라는 게 있어서, 꼭 탁월한 존재만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나 같이 남의 책을 소개하는 중간자도 있고 다소 비리비리한 존재들도 그 안에서 연결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생태계다. 참 다행이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coachingi.com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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