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 초년생일 때 선임 중에 독특한 사람이 있었다. 이 선배는 술을 좋아했는데, 술자리에 따라가면 우리를 앉혀놓고 회사 내 주요인물들의 파워게임과 정세 판단, 예측 시나리오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곤 했다. 선배가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설파하는 걸 들어보면 어느 본부장이 누구에게 밀렸으며, 사장은 누구를 배제 혹은 중용할 전략이고, 누구는 또 다른 누구를 이용하고 있는 거다, 조직개편은 다 지략과 물밑 거래의 결과다, 곧 누가 누구와 손잡고 저항할 것이다, 회사는 몇 년 내에 결국 이렇게 될 것이고, 그러면 누가 실권을 잡게 된다, 등등. 가히 직장 내 삼국지라 할 만했다.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회사는 뭔가 부당하고, 우리같이 순진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복잡한 판이며, 한마디로 장수들의 싸움터였다. 나중에 간부회의에 참석하게 된 내가 발견했던 이상한 점 한 가지는 선배가 회의에서 잠자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발언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열변을 토하는 정의파여야 하는 선배가 회의에서나 자기 상사에게 완전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며 어리둥절했다. 뭐지? 이것도 고도의 전략인가? 나중에 선배는 회사를 떠났고, 그의 예언과 달리 삼국지 같은 파국은 벌어지지 않았다. 회사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롭게 잘만 돌아갔다. 그토록 심각하고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그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우리 피라미들은 퇴직한 선배를 따로 만났다. 한 때 비장했던 선배는 뜻밖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고 살 길을 걱정하고 있었다. 약간 허탈하고 슬퍼져서 돌아오던 밤늦은 골목길이 지금도 생각난다. 내가 보는 것은 바른 것일까? 사람들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자신의 인식 틀로 세상을 본다. 코칭을 하다 보니 대상자의 상사 부하에 대한 인터뷰를 꽤 많이 해왔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한 가지 경향성이 있다. 상사들은 부하를 평할 때, ‘성과’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거다. 성과가 좋고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의 나머지 측면도 다 좋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성과가 좋지 않으면? 그 부하에 대해서는 없던 문제의식도 마구 생겨난다. 부하는 상사를 ‘자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상사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면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되고, 우리 부서 일에 대해 인정이 적으면 피플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식이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부하가 상사의 일을 전면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등산할 때 상사는 고지 1천미터에 있다면 부하는 500미터 지점에서 보는 식이다. 그래서 부하가 상사를 예단하는 것은 틀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상사가 인간적으로 더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부하의 바라보는 시야가 좁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선배도 어떤 프레임이 있었을 것이다. 직장과 상사가 자신의 프레임으로 완벽하게 해석되었던 거다. 나중에 리더십 공부를 하면서 팔로워십에 대해 배웠다. 켈리(Kellly) 교수의 팔로워 모델에 따라 분류하자면 우리 선배는 소외형 팔로워였는지도 모르겠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면에서 뛰어났으되,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보다는 뒤에서 관전평을 하는 데 머물렀으니 말이다. 우리들, 불우했던 그의 졸개들은 한동안 그의 관전평을 통해 직장을 해석했던 거다. 선배가 고지 5백미터에서 보는 바를 우리는 겨우 등산로 입구에서 전달받아 보았다고나 할까. 지금 코치가 되어 그때를 되돌아보면 아쉬운 것은 잘못된 삼국지가 아니다. 더 아쉬운 대목은 그 관점 때문에 선배 자신이 전혀 몰입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똑똑하고 열정이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바르게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불교 교리에서는 열반에 드는 팔정도의 하나로 정견(正見)을 중시한다. 정견이란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본다는 뜻이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바른 사유를 할 수 있고 수행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것이고, 한번 깨달았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정견이라고 한다. 감히 정견을 지향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인 나 같은 자들은 일단 내가 보는 인식틀에 대해 확신을 내려놓는 것이 그나마 취할 태도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지혜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겸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kookmin.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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