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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은 인과 관계의 엄연함을 남긴다. 무언가 존재했던 것들은 비록 변화하거나 사라져버렸다 해도 존재했던 영향이 기록처럼 남는 법이다. 주방에서 끓던 찌개가 사방에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오랜 빈 집에 두텁게 쌓인 먼지가 그 수직 낙하를 방해한 존재가 없었음을 거꾸로 증거하는 것처럼.

인과응보의 법칙은 엄연해서 무섭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은 크든 작든 결과를 야기한다. 에너지의 크기나 질이나 방향은 다르더라도. 노력은 결과로 귀결되고, 실수가 후회 거리를 제공하며, 우연한 용기가 뜻밖의 다음 단계를 가져오기도 한다.

새해 아침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실은 지난 몇 달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 그 국면에서 나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비난에도, 분석에도, 대안에도 뭔가 글을 보태기가 힘들었다. 정치는 물론이고 교육이든 작품이든 말과 글로 먹고 사는 행위들에 대한 혐오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얼마나 많은 똑똑한 지식인들이 선의로 포장된 많은 말과 글을 만들어냈던가? 그런데 실제는 아름답게 내걸었던 그 명분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음을 확인해야 했고, 우리 모두 너무 부끄러웠다.

말로 글로 참견하는 게 다 필요 없고 내 몸을 움직여 쓰레기 하나라도 줍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엔 세면장에 어질러진 휴지를 보면 그렇게 버리고 간 사람을 마음 속으로 비난했다. 지금은 얼른 내가 치워놓고 나온다. 모르는 사람을 비난하면서 마치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느꼈던 나의 이기심이 현실을 하나도 바꾸지 못했던 거에 비하면, 휴지를 치우는 것은 훨씬 이로운 일이다. 올해는 말을 줄이고 행동으로 뭔가를 해봐야겠다. 새해 결심에 나는 자기 숙련(self-mastery) 항목을 추가해본다. 

2017년 새해가 말처럼 새롭기만 하겠는가? 바로 어제였던 2016년까지 과거 우리가 해놓은 것의 인과응보로서 시작되는 것이니, 아름답기만 바라지 말자. 하지만 자세만은 단정히 하여 맞이하고 싶다. 아침에 걸맞게. 그런 마음으로 정현종 시인의 시 「아침」을 다시 읽어본다. 

아침
정현종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kookmin.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