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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금 신고를 위해 사용 내역 등을 신청하려고 카드사와 보험사에 여러 건의 전화를 했다. 모든 회사가 어김없이 ARS 자동응답기가 메뉴를 안내한다. 카드 분실 신고는 1번, 가맹점 문의는 2번, 또 무엇은 3번..… 지시에 따라 번호를 선택하면 다음 단계 메뉴가 또 펼쳐진다. 무엇은 1번 또 무엇은 2번. 3번. 다시 들으시려면 별표. 잠깐 어리버리하게 잘못 눌렀다가는 가차없이 오류로 다시 누르기를 반복하면서 무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마침내 마지막 단계까지 온 것 같은 순간에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먼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으니 잠시 후에 다시 이용하라’고 한다. 맥이 확 빠지면서 거의 삶의 의욕을 잃을 정도다. 은근 성격 급한 나에겐 이런 게 정말 쥐약이다. 개념적인 용어로 전달되는 ARS의 안내를 할머니들은 이용할 수 있을까? 

이번엔 엄청나게 간편해졌다는 국세청의 인터넷사이트 홈텍스에 접속했다. 편리해 보이는 메뉴들이 비주얼도 훌륭하게 펼쳐져 있어서 즉시 안심했다, 가 아니라 안심할 뻔했다. 역시, 인터넷이야! 그럼, 그렇고 말고! 그러나 잠시 후… 헉! 아무리 살펴보고 눌러보아도 나에게 필요한 딱 한 가지 자료, 작년 한 해 동안의 소득내역을 볼 수 있는 메뉴를 찾을 수가 없다. 없을 리가 없는데… 하면서 비슷한 용어가 쓰인 메뉴를 이것 저것 눌러보면서 거의 한 시간을 허비했다.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다. 결국 아는 세무사에게 전화로 문의했더니 홈페이지 상단에 아주 조그맣게 표시된 my NTS 메뉴를 눌러야 소득내역을 보는 메뉴가 나온다고 말해준다. 아, 그러고 보니 작년 5월에도 똑같이 이 순서대로 헤맸다가 똑같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보고서야 해결했던 기억이 났다. 나이 들면서 가뜩이나 미약했던 총기가 이렇게 흐려지나 보다. 하지만 말이다.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에 대부분의 사람이 홈텍스를 찾는 이유는 바로 이 용도일텐데 그걸 왜 그렇게 감춰놓는 걸까? 물론 그 기관의 입장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복잡함 총량의 법칙
기업이나 기관은 걸려오는 전화나 홈페이지 방문객들의 다양한 용무를 부처별로 담당자별로 분류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용자들에겐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알기 쉬운 것이 최고다. 복잡함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이른바 ‘테슬러의 복잡함 보존의 법칙’이 있다. 사용자가 단순하고 쉽게 이용하려면 그 이면에 설계자가 고려해야할 사항, 기술적으로 구현해야 할 사항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테슬러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모든 프로그램에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잡한 정도, 즉 복잡성의 하한선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 복잡함을 누가 감당하느냐는 것이다. 사용자인가, 아니면 개발자인가?” 

요즘 기업들의 출입시스템도 그렇다. 방문 예약을 인터넷으로 미리 다 받아 둔다. 그러고도 방문하면 신분증을 대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분증을 제출 받는다. 이것 때문에 개인정보 제공동의서를 작성하게 하고, 그러느라 휴대폰 번호와 소속을 다시 수기로 적어야 한다. 도대체 이럴 거면 사전 방문 예약은 왜 하는 걸까? 누굴 위해 적는 것이고, 이 기록들은 누가 보고 보관하는 걸까? 방문자를 위한 시스템은 아니다. 보안이라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복잡성을 방문자에게 떠넘기는 인상이다. 

책 「미친듯이 심플」의 저자 켄 시걸은 애플의 광고마케팅 에이전트로 스티브잡스와 오래 일한 인물인데, 잡스가 얼마나 심플에 집착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들이 썼던 아이맥 광고문구는 이렇다. “Simply amazing and Amazingly simple. (단지 놀랍고, 놀랍도록 단순한)”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실력인지 아는 거다. 애플만이 아니다. 요즘 스마트폰을 보면 기술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기능도 아주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단순화 되어 있다. 복잡성을 떠안은 결과다. 그 뒤에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엔지니어들 디자이너들 개발자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인간적인 소통이 단순함의 핵심이다. 관계를 형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인간다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ARS도 인간다운 언어로 단순하게 할 수 있을까? 만약 어떤 기업이 사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걸 남보다 편리하고 단순하게 해결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돈을 좀 더 낼 용의가 있다. 내가 받은 스트레스와 시간 낭비를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 무척 가치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kookmin.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