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난 국비로 유학을 다녀왔다. 국비는 나라에서 돈을 대주는 만큼 조건이 까다롭다. 일정 이상의 학점이 되어야 하고, 기간 안에 학위를 받아야 한다. 그 기간을 넘기면 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만큼 늘 학위를 따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다. 꿈을 꿔도 꼭 학위취득에 실패해 서울 가는 꿈을 꾸곤 했다. 처음에는 수업과 시험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다. 영어학원 한 번 안 다니고, 미국 사람들과 얘기 한 번 안 해본 내가 과연 영어로 하는 수업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근데 공학이고 수식이 많아 참을만했다. 가끔 시험범위와 수업변경에 대한 내용을 못 알아들었지만 수업 후 확인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오히려 시험에서는 미국애들과 비교해 압도적 우위를 자랑했다. 워낙 수업을 듣고 외우고 정리해 시험 보는 것에 훈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본 큠 (Cumulative Exam의 약자. 8번을 붙어야 박사자격이 있는데 그 시험을 통과 못해 박사학위를 못 끝내고 있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에 붙어 내심 내가 천재 아닌가 의심까지 했다. 물론 그 의심은 다음부터 연속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됐다.
박사학위를 위한 2년간의 코스워크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제는 실험만 하고 논문만 쓰면 되었다. 사실 연구소 경험도 있고 해서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박사논문을 쓰기 전 포멀 프리젠테이션 Formal Presentation이란 과정이 있었다. 어떤 논문을 쓸 것인지를 미리 고민해 전 대학원생과 교수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다. 제목, 개요, 가설, 실험의 목적과 과정 등을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사람들의 의견과 피드백을 받은 후 본격적인 실험에 들어가면 된다. 한국말도 아닌 영어로 많은 학생과 교수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니 얼마나 준비를 했겠는가? 몇 달간 잠도 설쳐가며 준비를 했다. 미리 질문할 사람까지 선정하고 리허설도 했다. 발표가 시작되었는데 지도교수 표정이 좋지 않다. 뭔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얼마간 발표를 하는데 지도교수가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스터 한, 대학 나온 사람 맞아요?”라는 질문을 한다. 모욕적인 질문이다. 당연히 “네, 당연히 졸업했고 한국에서 가장 좋은 서울대학교를 나왔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러자 “근데 발표가 그게 뭡니까? 대학에서 발표 해 본 경험은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 생각해보니 발표한 기억이 거의 없다. 늘 받아 적고, 시험 본 게 대부분이다. 머뭇거리자 이렇게 얘기했다. “미스터 한은 전혀 훈련이 되지 않았어요” 라며 피드백을 하기 시작한다. 내용은 심플하다. “왜 서론이 이리 기냐? 본론 기다리다 숨 넘어 가겠다. 그래서 하겠다는 말의 요점이 뭐냐?” 이어 태도에 대한 피드백이 시작되었다. “왜 청중을 보지 않고 칠판 쪽을 보는가? 당신이 설득할 대상이 칠판인가? 아니면 청중인가? 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땅을 보는가? 왜 자료에 글씨가 그렇게 작은가? 뒤에 앉은 사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장표 하나에 여러 메시지를 넣는가? 등등…” 발표 내용에 대한 피드백보다 발표순서, 스킬, 장표에 대한 얘기만 잔뜩 했다. 얼마 뒤 다시 발표를 했다. 지난 번에 비해서는 좋아졌지만 지도교수를 만족시킬 때까지 여러 번 발표를 해야 했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 난 지도교수를 원망했다.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했다. 발표내용을 봐야지 발표내용은 보지 않고 사소한 자세와 스킬을 갖고 쪼잔하게 얘기하는 교수님이 미웠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말하는 것이 그 사람이다. 발표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도교수 앞에서 헤맨 것은 사실 내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용을 잘 알지 못하니 중언부언 얘기했고 거기다 스킬까지 떨어지니 문제가 됐던 것이다.
여러분은 지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지식일까? 혼자만 알고 남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는 것은 많은데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사람들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래서 자신은 저평가되고 있다는 변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판단 기준을 위해 지식의 어원을 살펴보자. 지식의 한자는 知識이다. 知를 파자破字하면 화살 시 矢에 입 구口 이다. 지란 아는 것을 화살처럼 입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입으로 유창하게 뱉을 수 없는 것은 지가 아닌 것이다. 식 識은 말씀 言에 찰진 흙을 뜻하는 시戠로 구성되어 있다. 말씀을 진흙에 새긴다는 말이다. 글을 뜻한다. 한자에서 얘기하는 지식은 말하기와 글쓰기이다. 지식은 정보를 흡수해 나름 소화를 한다. 이후 말을 하면서 다듬고 글로 쓰면서 점점 정교하게 만든다. 고로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말로는 하는데 글로 전달할 수 없다면 그건 반 쪽짜리 지식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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