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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x 무대에 섰다. TEDx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무대다. 몇 달 전, 그 무대에 섭외를 받았을 때는 떨림 반, 기대 반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회사 적응과 행사 준비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원고는 가까스로 완성했지만, 영어로 연설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코칭을 받았다. 코치는 예상과 달리 “잘하실 것 같아요”라는 낯선 확신부터 건넸다. “어차피 잘하실 건데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계신 거예요.”라며 한 성악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코칭으로 만났다는 그 성악가는 세계 각국을 돌며 매번 초대받은 나라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에 대한 걱정보단 어떻게 하면 손을 잘 움직일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표정을 전달할지 코칭을 받는다는 거다. 중국에 가면 중국어로 가사를 외울 수 있고, 독일에 가면 독일어로 가사를 외울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그녀에게 언어는 ‘도구’일 뿐이었다.


코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영어 실력일까, 아니면 메시지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영어 실력으로만 연사를 뽑았다면, 나는 TEDx 무대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발음이 좋은지 나쁜지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더 궁금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완벽히 외우려 애쓰기보다, 내가 정말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며 한국어로 강의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졌다.


발표 당일, 대기실에 들어가니 어떤 분이 중얼중얼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AI로 작품을 만드는 최세훈 작가였다. 영어 연설의 부담감을 털어놓자, 본인도 영어를 잘 못한다며 걱정 말라는 그에게 같은 입장이니 함께 연습해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외우기를 멈추고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이야기는 마음속으로 상상했던 것들을 이미지로 표현해 보는 AI 작업을 시작한 계기에서 시작해 무작정 20개가 넘는 아트 페어의 문을 두드린 이야기, 작년에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처음으로 판매한 이야기, 그 시간 내내 그를 믿어주고 응원했던 가족 이야기로 이어졌다. 영어로 말했지만, 통역이 필요 없었다. 그의 진심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완벽함보다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국 프린스턴에 살게 되었는데 친절한 옆집 아저씨가 노벨상을 탄 사람이었고, 천재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이야기한 이하예 기자.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 따라 본인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음악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알아가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비올라 연주자 배서연 학생, 슬럼프로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절망에 빠져 울기만 하다가 ‘하루에 하나만 하자’는 마음으로 힘든 시간을 버티고 회복해 대학에 당당하게 입학한 첼리스트 배지연 학생까지…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렸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차례가 되어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결국 모든 내용을 외우지는 못했지만, 스크립트를 간간이 참고하며 청중의 눈을 바라보고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전했다. 청중이 기억하는 건 발음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청중 덕분에 느꼈다. 이야기가 이겼다. 진심이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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