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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막내는 작은 것 하나도 혼자 먹지 않았다. 어머니를 졸라서 1원(60년대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1원만 달라며 졸랐다)을 받으면 가게로 달려가 주전부리를 사 왔다. 1원어치를 사 왔으니 먹을 양이 많지 않다. 우리는 그런 막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언의 압력이다. 막내는 주전부리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두 명의 누나와 형 얼굴을 한 번씩 보고는 조금씩 나눠줬다. 원체 적은 양이라 이렇게 나눠주고 나면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몇 번 주전부리를 입에 넣고 조물딱거리다 보면 빈손이 됐다. 아무 생각 없이 형제들에게 나눠준 막내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나와 형이 막내를 부추겼다. “또 돈 달라고 해.” 막내는 다시 어머니에게 가 ‘돈 달라’고 조른다. 어머니는 ‘조금 전에 돈 줬는데 또 무슨 돈을 달라고 하느냐’며 막내를 혼냈다. 늘 그랬다. 막내는 나눠주고 혼났다. 장면 2. 중학교 때로 기억한다. 친구와 함께 시험공부를 했다. 무슨 과목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친구가 나에게 한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다며 알려달라고 했다. 마침 내가 알고 있었던 지라 자세하게 알려줬다. 친구는 감탄했고, 나는 뿌듯했다. 시험을 보고 결과가 나왔다. 그 친구는 나보다 점수가 좋았다. 그때 든 생각. ‘나, 뭐니?’ 잘난척하고 알려줬는데 실은 그 친구보다 내가 공부를 더 못하는 아이였다. 창피했다. ‘너나 잘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칭 공부를 시작하고 선배 코치에게 첫 코칭을 받았을 때다. 선배 코치가 나에게 물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눠주시겠어요?” 깜짝 놀랐다. 나눠달라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눠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눠달라고 한 기억도 없다. 내 것 챙기기에도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았다. 누구에게 나눠주겠는가? 그렇다고 누구에게 나눔을 받기도 싫었다. 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장면 1과 장면 2에서처럼 나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고, 주는 것은 손해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내 삶을 지배했다. 내 삶의 흐름은 ‘나누지 않는다’는 무의식으로 팽팽했다. 그런데 이날 아주 오랜만에 ‘나눠주시겠어요’가 벼락처럼, 천둥처럼 아주 크게 귓속으로 떨어져 울렸다. 속으로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시겠어요?” 아니면 “오늘 어떤 일이 있으셨어요?”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나눠주겠느냐’라고 표현한 게 훨씬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서다. 문제는 이후 이 말을 여러 코치에게 들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어느 한 코치의 가식이나 개인 습관의 언어가 아닌 게다. 이때부터 코칭에서의 활용 단어 아닌가 싶어졌다. 시간은 제 몸을 흔들며 나를 코치로 만들었다. KAC를 거쳐 KPC가 되면서 나름의 코칭 개념을 갖게 됐을 즈음, 입가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코칭은 실상 나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객의 마음을 열게 하고,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둔 진짜 얼굴을 스스로 깨닫도록 질문하고, 그 마음과 얼굴을 코치가 온전히 받아들여 공감하고 인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게 코칭 아닌가. 그렇다면 고객의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열어 나눠야 하고, 질문하기 위해서는 고객을 호기심으로 대해야 하는데 이 또한 나의 관심을 나누는 것 아닌가. 코칭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눔을 기본으로 하는 대화의 방법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나눈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성장의 재료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느낀 순간 ‘아, 나는 왜 진작 이것을 알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일었다. 또 살면서 나눈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탐색하지 못하고, 과거 인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내가 미웠다. 수많은 반성 속에서도 으뜸의 반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코칭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고객에게 말한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눠주시겠어요?” * 칼럼에 대한 회신은 moonk0306@naver.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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