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딸 부부와 주원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가 부지런을 떤다. 안 온 적이 거의 없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주원이부터 딸과 사위까지 셋 다 컨디션이 별로라고 한다. 갑자기 집에 비상이 걸렸다. 편하게 책을 보고 있는 내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건넌방에 주원이 이불 펴고, 이걸 치우고 뭘 어떻게 하라”라고 지시가 떨어진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아내 지시에 따른다. 아내는 북엇국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주원이 먹을 걸 준비하느라 바쁘다. 전화를 걸어 콩나물도 주문하고 식탁을 치운다.
사실 아내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움직인다. 아내가 하란 걸 한 후 부엌에서 아내를 도우면서 아내를 봤다. 눈이 반짝이고 사기가 충천해있다. 전쟁을 앞둔 병사처럼 비장하면서 신이 나 있다. 본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다.
딸 둘을 다 시집 보내고 나면 아내가 편할 줄 알았다. 나이 60이 넘으면 뭔가 주말에 우리만의 우아한 시간을 가질 거로 생각했다. 근데 그렇지 않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주변에 여유롭게 사는 집들이 제법 있다. 명절 때마다 해외로 놀러 다니고, 돌볼 사람도 거의 없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완전히 반대다. 그렇지 않아도 바빴는데 딸들 결혼시킨 후 더 바빠졌다. 주원이가 태어나면서 기존의 힘든 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내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건 주원이 먹거리다. 무얼 먹여야 좋을지를 가장 많이 생각하고 준비한다.
아내는 다섯 집 살림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장모님과 어머님을 돌본다. 혼자 사는 어머님을 위해 틈틈이 장을 봐 드리고 음식을 해다 나른다. 어머님은 아내가 끓여다 주는 미역국이 제일 맛있단다. 주기적으로 미역국을 왕창 끓이고 반찬을 해서 어머님과 장모님께 갖다 드린다.
딸 둘의 살림도 아내가 하는 셈이다. 주말마다 오는 딸들을 위해서도 먹을 걸 준비한다. 과일도 사다 나눠주고, 생선도 조려주고, 불고기 거리도 미리 만들어 놓는다. 김장도 많이 해서 여러 집에 나눠준다. 난 뒤치다꺼리와 배송 담당이다. 아내는 손목이 약해 부엌일을 많이 하면 안 되는데 손목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파스를 붙여주고, 손목이나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쓰는 건 주원이 봐주는 일이다. 매일 저녁 앞에 사는 딸 집에 출장 가서 두 시간씩 애를 봐주다 온다. 이기적인 난 힘들다는 이유로 텔레비전을 보다 꾸벅꾸벅 존다. 아내가 돌아올 때면 비몽사몽이다. 날이 갈수록 집안에서 아내 비중은 커지고 내 비중은 작아진다. 내가 없는 건 별지장이 없지만,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우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가동 중단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다. 아내가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아내가 올 날만 계산한다.
모두 아내를 필요로 한다. 그냥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너~무 너~무 필요로 한다. 아내는 그런 존재다. 나도, 우리 애들도, 어머님도 장모님도, 심지어 처남들도 무슨 일만 생기면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양쪽 집안의 기둥이자 중앙통제실인 셈이다.
삶에서 절정기란 어떤 때일까? 절정기는 어떤 의미일까?
돈을 많이 벌 때, 가장 건강할 때, 가장 바쁘고 잘 나갈 때? 내가 생각하는 인생 절정기의 정의는 “가장 많은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는 때”다. 여기저기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잠시라도 없으면 빈 구멍이 숭숭 날 때가 전성기다. 그렇다면 쇠퇴기는 언제일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할 때다.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갈 때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지금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고 당분간 절정기는 계속될 듯싶다. 아마 주원이가 중학교 들어가면 조금 한가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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