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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그러니까 대한극장은 50년 전에도 여기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곳에서 처음 영화 보며 데이트 했던 것이 1969년 11월이었지 아마.”

‘로렌’은 막내 사위가 일리노이 대학에 유학할 때 낳아온 손녀로 올해 2월이면 만 열셋이 되는 아름다운 소녀다. 부모 따라 귀국한 뒤 어찌어찌 해서 서울에 있는 프랑스 학교를 다니고 있다. ‘스타워즈 - 최후의 제다이’를 할아버지와 같이 보고 싶다고 데이트 신청을 해와서 대한극장에서 만났다.

“그 1969년의 가을,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감동 속에서 내가 수줍어하는 네 할머니의 손을 잡지 않았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생겨났겠니?”

‘로렌’의 홍조 띈 양 뺨에 프랑스 식으로 볼을 부비며 할아버지가 마음 속으로 해본 말이다.

막내딸과 ‘로렌’은 방학이면 늘 미국에서 귀국하여 외가에 둥지를 트고 기거했다. 다섯 살 때였나? 식탁에서 밥 먹다가 ‘로렌’이 눈을 깜빡이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요~ 풀 오브 사운드.”

“아니, 풀 오브 노이즈,”

할머니가 초를 치기는 했지만, 나는 감동했다. 할아버지가 오가며 마루에 슬리퍼 끄는 소리, 쩝쩝, 찍찍, 밥 먹는 소리, 그릇과 수저 부딪치는 소리, 이 모든 이른 바 노이즈(noise)를 천사 ‘로렌’은 음악[the sound of music]으로 들어주었던 것이다. 마음이 소리를 듣는다.

멘토 코칭을 받던 코치 초기의 일이다.

내 코칭의 녹취를 뜨다가 많이 놀랐다. 필요한 말 사이사이에 필요 없는 잡소리가 어찌나 많은지. 그러나 멘토가 이를 특별히 지적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분별하려는 내 의도가 과도히 예민했거나, 멘토가 내 언어 습관에는 관대하여 굳이 분별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엊그제 안방 극장을 차려 놓고, 50년 만에 ‘사운드 오브 뮤직’을 비디오로 감상했다. 아내의 주름 늘어난 손을 짐짓 다정히 잡기도 하면서.
“아니, 영화 보면서 울기는 왜 운다지?”

남들이 울지 않는 장면에서 나는 가끔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강점혁명’의 빌어 발견한 내 다섯 가지 강점 중 첫 번째가 ‘공감-Empathy’이라니, 그럴 싸 하다.

‘So long, Farewell’을 부르며 트랩 가의 일곱 아이들이 계단에서 파티 손님들과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분은 기억할 것이다. 다섯 살 ‘그레텔’ 이 졸린 듯 계단에 눕고 큰 딸 ‘리즐’이 막내를 안아 올리는 장면은 슬픈 장면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지? 아내에게 또 한번 지청구를 받았다.

신심명(信心銘)에,

迷生寂亂이오 悟無好惡이니 一切二邊은 良由斟酌이라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닫고 나면 좋고 나쁨이 없다.

일체 이변은 모름지기 짐작을 말미암는다.

마음의 이치를 모르면 고요하니 어지러우니 하는 일들이 마음 속에서 시끄럽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선악도 사라진다. 모든 치우친 생각, 간택하는 생각이 이변(二邊)이다. 그러나 실상 이변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이 상대적으로 있다고 마음 속에서 짐작할 때 비로소 이변이 된다. 그래서 ‘양유짐작’이라고 한다.

마음이라는 필터를 통하여 현상을 보고 듣는다. 할아버지의 ‘노이즈’를 분별 없는 마음으로 들으면 ‘사운드’가 된다는 마음 법칙이다.

분별 없는 마음이라야 진정한 공감을 일으켜 존재와 존재 간의 세밀한 연결을 이룬다. ‘Egoless’ 라는 코칭의 기본 전제이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dhugh@hanmail.net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