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재방송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작년 여름 방송에 나갔을 때 시청률이 꽤 높았던 영동고속도로 가요제였습니다. 지드래곤, 아이유를 비롯해서 혁오, 자이언티처럼 최근에 뜬 가수들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상과 박진영도 있었습니다. 저는 윤상과 박진영의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음악을 많이 듣는 아내는 이들의 음악은 촌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자이언티나 혁오 같은 ‘요즘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옛날 스타일인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수는 평생 자기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작곡가도 마찬가지로 평생 자기 스타일의 곡을 만드는 것이죠. 가수가 시대에 맞춰서 자기 스타일을 변화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20대 전후로 즐기던 음악을 평생 듣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월요일 밤에 KBS에서 나오는 가요무대를 항상 보는 걸 보고 후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는 왜 저렇게 트로트 같은 옛날 음악만 듣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즐겨 듣는 트로트는 어머니가 20대 전후에 듣던 세련된 음악이었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젊은이들의 음악 스타일이 바뀌고, 어머니가 즐겨 듣는 음악은 월요일 밤으로 밀려났던 겁니다. 저는 20대 전후로 시끄러운 헤비메탈이나 록음악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제 휴대폰에는 80-90년대 밴드들의 노래만 가득합니다. 주로 그것만 듣습니다. 제가 ‘이 좋은’ 음악을 큰 소리로 틀어놓고 들었더니 제 딸이 귀를 틀어막더군요. 1999년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유명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6명의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쪽은 검은색 셔츠를 입히고 다른 쪽은 흰색 옷을 입힌 후, 두 팀을 섞어서 서로 농구공을 패스하게 했습니다. 이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준 후 흰색 팀이 주고받은 패스의 수를 세도록 했습니다. 영상을 다 보여주고 나서 참가자들에게 “혹시 고릴라를 보았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참가자 절반 이상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다시 돌려봤더니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학생들 중간에 들어와서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 흉내를 내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영상을 다시 본 사람들은 고릴라가 저렇게 활보하는 걸 못 봤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입니다. 고릴라가 카메라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 가슴을 두드린 다음 멀어져 가는 것을 어떻게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이는 인간의 뇌가 기대한 것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부릅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패스 횟수를 세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바로 눈 앞에 있는 고릴라에게는 눈이 먼 것입니다. 우리의 뇌가 이런 식으로 발전한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머리를 쓰는 데 워낙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죠. 뇌는 필요한 정보만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자극은 배제시켜 능률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와 불필요한 자극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신이 겪은 경험과 간접적으로 학습한 지식입니다. 경험과 지식이 직관을 만들고 빠른 판단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경험과 지식은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흔히 전문가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 틀에 박힌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명백한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리더의 경험과 지식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부채가 되기도 합니다. 리더는 자신의 경험으로 성공해왔기 때문에 그 성공법칙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가요무대일 수도 있습니다. 리더의 경험과 지식은 사업의 게임 룰이 바뀐 곳에서는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경험 때문에 신세대들과 세대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힙합을 즐기지 못했는데요, 요즘 케이블에서 나오는 <쇼 미 더 머니>라는 힙합 경연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오랫동안 보지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자꾸 보니 조금씩 즐기게 되고, 힙합 음악도 좋아졌습니다. 아아, 무한도전 가요제에 나왔던 자이언티가 이 프로그램에서 심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capomaru@gmail.com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
PREV [한근태] 리더를 위한 한자인문학
-
NEXT [한근태]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