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봄비가 내릴 때였습니다. 그날은 우연히 몇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던 새 우산을 집어 들었습니다. 집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모인 우산이 열 개가 넘는데, 저는 웬만하면 헌 우산을 씁니다. 그 날은 황급히 나오느라 새것을 들고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 우산은 제가 가장 아끼는 걸로 집에서만 펴보고 거의 쓰지 않던 것이었습니다. 꽤 비싼 2중 자동우산인데 한 번 누르면 우산이 펴지고, 펼쳐진 상태에서 단추를 누르면 우산살이 자동으로 접히는 우산이었습니다. 물론 3단으로 된 우산대까지 자동으로 줄어드는 건 아니라서, 접힌 우산을 끌어당겨야 딸깍하면서 마무리되는 그런 제품입니다. 펴지기만 하는 자동우산은 스프링 때문에 접을 때 힘을 줘야 하는 게 다소 불편합니다. 특히 자동차를 탈 때 빨리 안 접혀서 항상 비를 듬뿍 맞게 됩니다. 이럴 때 단추 한번으로 손쉽게 접을 수 있는 거지요. 아마 집에 하나쯤 가지고 계실 겁니다. 우산을 펴서 써보니, 천의 무늬도 고급스럽고 우산살까지 까맣게 꼼꼼히 코팅된 게 역시 좋더군요. 하지만 거기까지 였습니다. 그 날 우산을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빠듯해서 조금 뛰었는데요, 뛰니까 자연스레 손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그랬더니 단추가 눌러져서 비가 흠뻑 오는데 우산이 접히는 겁니다. 얼마나 황당하던지요. 그런데 또 문제가 되는 게, 이 우산은 우산대를 당겨 딸깍할 때까지 추스르지 않으면 다시 우산을 펼 수가 없는 겁니다.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꾸역꾸역 우산대를 줄여서 딸깍한 후에 다시 펼쳐 들었습니다. 아아, 이게 웬일입니까. 한 30미터 뛰어가다가 그런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날 비를 꽤 많이 맞았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우산인데, 아껴서 집에서만 펼쳐보고 쓰지 않았던 건데, 애물단지더군요. 저처럼 아껴두다가 후회하신 적 없나요? 미래를 위해 좋은 걸 미뤘던 적은 없으신가요? 그 날 집에 오면서 저희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두 분이 재미있는 걸로 항상 다투셨습니다. 어렸을 때 가을에 사과철이 되면 두어 박스씩 사서 지하실에다 두고 겨우내 먹었습니다. 온도가 낮아서 빨리 썩지는 않지만 한두 달 지나가면 사과가 물러지고, 시간이 더 가면 부분적으로 썩어 들어갑니다. 어머니는 항상 흠이 가장 많은 사과를 골라 오셨고, 아버지는 항상 제일 멀쩡한 사과를 골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면 나중에 못 먹게 되는 사과가 많이 생기니까 썩기 전에 먹어야 한다며, 아버지께 불평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되받으셨습니다. “당신처럼 먹으면 항상 제일 나쁜 사과를 먹게 되고, 나처럼 먹으면 항상 제일 좋은 사과를 먹게 되는 거지.” 저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저도 냉장고 안에 있는 귤을 꺼낼 때 무의식적으로 무른 것에 손이 가더군요. 멀쩡한 거 놔두고요. 그러니까 애물단지 우산을 몇 년 동안 아꼈겠지요. 길로비치와 메드벡(Giloviqh, Medvec)이란 심리학자가 오랫동안 후회에 관한 심리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이들의 대표적인 실험을 친숙한 사례로 바꿔보면 이렇습니다. 두 교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상황은 행동하지 않아서 손해 본 상황입니다. 가령 아파트를 옮겨볼까 하다가 옮기지 않았는데, 이사 가려 했던 아파트값이 올라 1억을 벌 수 있었는데 손해를 본 것입니다. 두 번째 상황은 행동해서 손해본 상황입니다. 아파트를 옮겼는데, 옛날 아파트 가격이 올라 1억의 손해를 본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더 후회가 되겠는지 물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0명 중 9명은 아파트를 옮겨서 손해를 본 경우에 후회가 더 클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즉,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은 것(inaction)보다는 어떤 행동을 한 것(action)으로 인한 후회가 더 클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랫동안 후회의 감정에 대해 연구한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의 이런 예상과 상반되는 현실을 밝혀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문해 보았더니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던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했던 것보다 하지 않았던 것을 훨씬 더 많이 후회한다고 답했습니다. 가령 어떤 시험에 떨어지고 재도전하지 않은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한 것,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 등을 가장 빈번하게 후회했습니다. 안 좋은 결과가 나와도 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동을 한 후에는 결과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해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파트를 옮겨서 1억원을 손해 보더라도 ‘이 아파트가 지난 번보다 살기에는 훨씬 좋지’ 라고 위안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후회에 대한 예측’과 ‘후회’는 다르다는 겁니다. 분명 후회할 거라고 예상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하지 않는 일이 많은데, 오히려 이게 더 후회가 된다는 거지요. 우리는 실패하거나 일이 잘 안되면 크게 후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미래를 위해, 미래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당장 하고 싶은 걸 미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후회하지 않는 법은 반대입니다. 현재 하고 싶은 일을 저지르는 게 후회 없이 사는 법이라고 연구결과가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일의 결과는 우리가 예측한 것만큼 후회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저도 진작 그 우산을 사용할 걸 그랬습니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capomaru@gmail.com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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