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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0년엔 합격을 확인하려면 대학에 가야 했다. 추운 1월 하순의 어느 날, 오빠와 버스를 타고 관악캠퍼스 정문으로 갔다. 정문 옆 게시판 두 개에 합격자 번호가 게시되어 었었다. 함께 간 오빠가 먼저 보고 와, 함성을 질렀고, 주변에는 부둥켜안는 사람, 말없이 끄덕이는 사람… 몇 번이고 다시 보며 자리를 못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정문에서 합격자 명단을 보고서야 비로소 단과대학에 가서 합격증을 받아왔다.

딱 31년 후 큰 아이가 대학입시를 치렀는데, 합격자 발표는 정해진 시간에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본인 번호를 입력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딱 결과를 보여준다. 너무 빠르고 엄연해서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다. 

합격이나 불합격은 흑과 백이고, 모 아니면 도다. 복불복이다. 결과에 중간지대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실력은 그렇지 않다. 별로 차이 나지 않는 실력들이 촘촘하게 연속되어 있는 식이다. 대학 교수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학부 학생들의 성적 처리였다. 되기 전엔 이렇게 힘들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학생들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 과제물 평가, 출석 점수 등을 학생들 명단에 기록하고 이를 엑셀파일에 성적순으로 정리한다. 동점자가 없을 리 없다. 특히 중간 지대에 동점자가 촘촘하게 몰려 있는데, 반드시 A,B,C 학점을 줄 수 있는 비율은 정해져 있어서 이를 어기면 아예 성적 입력이 안 된다. 거의 비슷한 성적, 단 1점 차이로 C를 주어야 할 때 괴롭다. 그 학생의 선한 눈망울이 떠오르기까지 하면 쉽게 저장 키를 누르지 못하고 여러 번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강제된 상대평가 시스템에 따라 일하면서,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 수준이 높아져서 절대평가가 기능을 하길 정말 간절히 바라게 된다.

지인의 아들이 몇 년 동안 자격고시를 시도해보다 안 되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코칭을 해달라고 해서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물어보았다. “비록 시험은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본인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처음엔 별로 없는 것 같다더니,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또 뭐가 있느냐고 했더니 한참 생각하더니 “지식이 늘었다”고 한다. 그렇지! 약간의 점수 차이로 떨어졌으나 3년간 공부했던 지식은 고스란히 본인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거다. 또 뭐가 있을까? 수험 생활하면서 집중력이 높아진 것, 예전엔 잘 안 된 사람을 보면 루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이 되고 보니 그렇게 문제 있는 건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 등… 코칭 시간에 얘기를 나누면서 수험생활이 쓸모 없는,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거기서도 배움이 있었다는 걸 정리하게 되었다.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자격과 실력에 대해 또 생각해 보게 되는 사건이었다.

올해 3월에 국제코치연맹의 최고 코치자격인 MCC 합격 소식을 받았다. 일요일 아침 침대에서 스마트폰으로 실눈을 뜨고 확인한 이메일이었다. 가족과 동료 코치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고 축하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자격증이 모 아니면 도, 흑과 백 같은 거라면 실력은 촘촘하게 연결된 연속선 같은 것이라는 걸. 자격이 없어도 그만한 실력을 갖춘 이들은 많다는 걸. MCC자격은 내게 하나의 자기 수련(self-mastery)의 과정이긴 했다. 그 과정의 하나의 성취로, 딱 그만큼 의미를 두고 자축하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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