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요즘 먹방과 쿡방이 대세다. TV만 틀면 뭔가를 먹는 풍경이다. 전국의 맛집 탐방 프로, 세프들의 요리 프로, 어촌에서 혹은 산촌에서 밥해먹는 프로, 누군가의 냉장고를 스튜디오로 가져오는 프로, 유명인 아빠가 자녀를 돌보는 프로도 결국 무언가를 먹고 먹이는 장면이다.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가득 만족스럽게 먹는 모습이 화면을 채우는 것으로 끝난다. 땀을 흘리며, 눈을 크게 뜨고, 맛에 감탄하며, 끝내주는 맛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 동원된다. 거기에 감정이입이 되어 나도 뭔가 먹고 싶고, 뭔가를 만들고 싶어진다.
불안이 만들어내는 퇴행 이런 열풍은 얼마나 됐을까. 먹는 방송이 너무 많아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한 친구와 이게 혹시 우리 사회의 ‘퇴행현상’이 아닐까 하는 대화를 나눴다. 퇴행(退行, regression)이란 심리학 용어로, 불안을 일으키는 내적 위험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기제다. 욕구불만 때문에 더 어린 이전의 단계로 돌아가는 거다. 잘 크던 아이가 동생을 본 뒤 갑자기 오줌을 가리지 못하거나 잘 걷다가 다시 기는 것도, 갓난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기는 데 대한 방어로서의 퇴행이다. 친구의 통찰력 있는 한마디에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은 끝나고 경쟁은 심해지고 불확실한 세상이다. 청년도 장년층도, 노인도 여성도 안심할 수 없고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불안감이 짙다. 이런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일차적인 욕구로 퇴행하는 건 아닐까. 먹는 것은 안심을 주고 우리를 위로한다. 마치 해지면 엄마가 부르는 집으로 돌아가 밥상에 앉는 것처럼, 쿡방과 먹방은 경쟁이 만연한 세상에서 벗어나 따뜻한 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경험이다, 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성숙함이란 하지만 퇴행도 결국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하나다. 성숙이란 무엇일까. 자기중심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거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 말고도 세상엔 사람들이 엄청 많으며 그들이 모두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나를 확장하는 것임을 아는 것, ‘내가 옳고 가장 중요하다’는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과정이 성숙이 아닐까? 요즘은 책임 있는 어른이 되는 게 두려운 세상이다. 예전엔 조금만 크면 어른 흉내내기 바빴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리광 섞인 억양과 비음을 쓰는 직장인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어리고 미숙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방어기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십대가 되어서도 자긴 아직 어리다고 말하는 사람도 봤다.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된 나이가 43세다. 도대체 뭐가 어리다는 걸까?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불안이 우리를 어린냥하는 퇴행을 만드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을 잘 보면 그 사람이 성장을 위한 도전에 직면했음을 말해주는 사인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성장이란 일직선 같은 코스가 아니라, 성장과 퇴행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도 돌아가신 엄마 대신 엄마 역할을 했던 우리 언니와 대화할 때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림없을, 어리고 유치한 감정이 서슴없이 튀어 나온다. 이건 상대를 봐가며 나오는 퇴행현상인가 보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들이 들어있다. 갑자기 동생을 봐서 퇴행현상을 보이는 아이에겐 부모가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처방이듯이, 우리 안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도 세상은 길게 보면 정의가 승리하는 공정한 곳이고, 우리의 선의를 사람들은 알아줄 것이고 서로 지지해주는 따뜻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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