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딸이 딱히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진로도 못 정하고 헤매고 있다며 걱정하는 지인께 장자(莊子) 이야기를 해드렸다.
“쓸모 있는 나무는 일찍 베어진다. 계피나무는 향기가 있다고 하여 베고, 옻나무는 베어서 칠에 쓴다. 하지만 옹이가 박히고 결도 좋지 않아
어디에도 쓸모 없었던 나무는 베어가는 사람이 없어서 가장 크고 무성하게 자라 원래 나무의 본성을 발휘한다.”는
얘기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본성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던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이란 역설의 지혜를
가르쳤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초년에 보인 작은 재주로 진로를
결정하는 건 쓸모 있는 나무가 일찍 베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나 대기업
홍보팀에 들어간 친구는 20년쯤 지나고 나서야, 글다운 글을
쓰는 작가의 꿈에서 더 멀어졌다고 한탄한다. 일찌감치 정치에 뜻을 품고 국회의원 비서부터 시작한 친구는, 그것이 정말 정치의 본령에 이르는 길인지 회의하는 중이다. 공부를
오래 하느라 취직과 결혼이 늦어진 친구가 있었다. 친구도 불안해하던 때, 나는 장자의 이 얘기를 하면서 ‘아마 너야말로 가장 본성을 살리는
삶을 살 것’이라고 했었다. 지금 그 친구는 전문성과 브랜드를
확실히 쌓았고, 이런 저런 재주로 일찍 취직한 친구들보다 더 자유롭게 자기다운 삶을 사는 것 같다.
내가 장자를 좋아하는 것은 그 자유로움과 웅대함 때문이다. 장자를
읽다 보면 쩨쩨하게 격식을 따지고, 인위적인 규범을 주입하는 것이 못난 짓처럼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도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울 거라고, 사람의
타고난 본성을 더 믿게 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빈둥거리는 걸 잘 참지 못한다. 일과
공부는 생산적이고 유용한 것이며, 빈둥거리고 노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는 ‘유용함’을
이렇게 묻는다. “걸어가는 데 발을 딛는 땅만이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발을 딛는 만큼만 땅이 있고, 나머지 땅이 정말 없다면, 즉 디딜 자리만 땅이고 나머지가 완전 허공이라면 과연 사람이 걸을 수 있겠는가?”
아마 걸을 수 없을 것이다. 쓸모 없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유용한 것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가 가르치는 무용지용이다. 공부와 놀이도 그런 조합이다. 쉬고 즐기고 사랑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고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없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일하는 의미도 사라질지 모른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마르게 재촉하는 대신 잠재력을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부모, 내공
있는 상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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