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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딸이 온 가족을 데리고 매년 한국을 방문해 우리 부부가 사는 집에 한 달 남짓 지내다 가는 것은 우리 집만의 리추얼(Ritual)이다. 이때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딸네 가족에게 맞춰 생활한다. 미국에 살다 보니 먹고 싶은 게 많아 먹는 것도 그들 위주로 움직인다. 감자탕을 먹고, 강강술래 진갈비를 먹고, 주말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흙토담골을 가자고 한다. 주말에도 대부분 집에 있는 내게 그런 일은 예외적이다.


둘째 사위가 바빠 딸과 손녀를 차에 태우고 점심을 먹으러 다녀왔다. 맛은 있었지만 길을 잘못 들어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갔다. 뒤에 앉은 손녀는 에너지가 넘쳐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댔다. 처음에는 귀엽지만 오래 차를 타고 있으면 귀가 아플 지경이다. 소음에 예민한 내게는 힘든 일이다. 꼴랑 아침에 운전해 점심 한 끼 먹고 왔을 뿐인데 완전 파김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차 타고 가족들 데리고 점심 먹고 온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피곤할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운전해서 어딘가를 다녀오는 일은 남들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내게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난 평생 누군가를 위해 운전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남의 집 부모는 애들 등하교와 학원을 몇 년씩 데리고 가고 온다는데 내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도 잘하는 일은 있다. 가족들을 웃기는 일이다. 의도적으로 웃기는 게 아니라 워낙 허점이 많으니까 이를 통해 가족들은 웃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집안 분위기도 좋아지는 것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딸이 오래전 고3 때 일을 꺼냈다. 당시 지인이 보름 일정으로 남미에 가자고 제안했다. 일정도 좋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흔쾌히 수락했는데 아내와 딸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빠가 없으면 웃을 일이 없고, 그럼 고3 학업 스트레스를 풀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원 세상에 이런 일이!! 거의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없는 가족의 부탁이라 여행을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이 기억하는 내 실수의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정말 1박 2일을 얘기해도 다 못 할 지경이다. 헬스를 가면서 내 옷 대신 딸 옷을 입고 간 적이 있다. 조금 작다고 생각은 했지만 다들 자고 있어 어둠 속에서 갈아입어 일어난 일이다. 나중에 이를 안 온 가족이 포복절도했다. 울산에 새벽 강의 가면서 딸 안경을 쓰고 간 적도 있다. 다 커서도 노상 우리 부부 자는 방에 와서 같이 자다 보니 내 안경 옆에 딸 안경이 있어 벌어진 일이다. 조금 뿌연 느낌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딸 안경 쓰고 가지 않았냐구. 다들 역시 우리 아빠는 다르다고 나를 놀렸다. 그래서 뭔가 잃어버리거나, 실수를 하면 다들 “왜 한근태스러운 행동을 해?”라며 나를 놀린다.


결혼 전에는 우리 딸들도 자기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근데 결혼해서 남편과 얘기를 나누면서 자기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한 번도 잔소리를 한 적이 없는 사람, 공부 등의 문제로 차별을 하지 않은 사람, 무엇보다 늘 자신들을 웃게 한 재미있는 아빠. 그게 우리 딸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다. 근데 난 전혀 의도한 게 아니다. 웃기려고 실수한 건 더더욱 아니다. 내 주특기 중 하나는 재킷을 벗어놓고 그냥 집에 오는 것인데 그날도 아내에게 미리 부탁을 했다. “여보, 난 오늘 강의 있으니까 혹시 재킷 두고 가면 좀 얘기를 해줘.” 남을 웃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 쉽고 자연스런 일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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