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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의 K 사장이 식사를 하다 불쑥 물었다. “1천 원, 1만 원, 5만 원권 지폐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 돈을 모두 가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퍼뜩 답이 떠오르지 않아 “뜸 들이지 말고 답을 가르쳐달라”고 다그치자 그가 웃으며 답했다. “땅에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권력이든 금력이든 복지부동으로 납작 엎드려야 엎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어 K 사장은 “그동안 살면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못 자랑스럽게 “무릎을 꿇은 적도, 꿇린 적도 없다”고 답했더니 “아마도 그래서 당신은 돈을 많이 못 버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무릎을 꿇은 경험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는 작은 알짜기업을 운영하는 B 사장과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가업을 물려받아 나름 알토란같이 회사를 성장시켜온 B 사장은 자신뿐 아니라 회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급하게 자금을 융통할 일이 생기자 K 사장에게 금융계 인사를 소개해달라는 청을 해왔다. 웬만하면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성격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예기치 못한 부탁에 K 사장은 다소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 이후였다. K 사장도 있는 자리에서 B 사장이 소개받은 인사에게 대뜸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K 사장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그 자존심이 센 사람이 무릎을 꿇는 게 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꿇어야 했던 거죠. 사장이라면 대의를 위해서, 조직과 구성원을 위해서 때로 무릎을 꿇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모욕과 굴종을 당하더라도 구걸해야 할 때는 구걸해야 합니다. 자신의 체면을 내세우며 뻗대는 것이 작은 자존심이라면, 회사를 위해 무릎을 헐값에 내놓을 줄도 아는 게 큰 자존심, 진정한 자존심이죠.”


그의 말을 듣고 어느 방송국 피디의 연애담이 떠올랐다. 그 피디는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새까맣고 못생긴 선배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죽자 살자 좋다고 쫓아다녔지만, 면박만 당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그녀가 “내가 이렇게 싫다고 하는데 선배는 자존심도 없어요? 왜 자꾸 쫓아다니는 거예요” 하며 퉁바리를 주었다. 그때 그가 조용히 답했다. “자존심, 그건 없어도 살 자신 있는데 너 없이는 살 자신이 없어서 그래.” 이 한마디로 그는 지금의 아내를 얻었다는 이야기였다.


“좋은 리더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당신의 자존심을 집에 두고 나오는 것이다.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집을 나서라.”


하긴 ‘별주부전’ 이야기를 돌이켜보라. 바닷속 용왕에게 잡혀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토끼를 살아나게 한 것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담대한 기개가 아니라 간을 빼놓고 나온 기계(奇計)가 아니었던가.

* 칼럼에 대한 회신은 blizzard88@naver.com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