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대학교수 시절 주중에 팀원들과 반나절 등산을 한 적이 있다. 오전에는 각자 일을 하고 오후에 삼청공원 뒷길을 이용해 서울성곽을 올라갔다. 서울에서 오십 년을 넘게 살고 근처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이 길은 처음이다. 서울이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이토록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아기자기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연의 냄새를 실컷 맡았다. 바로 밑이 서울의 가장 번화한 곳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큰 바위에 누워 가을 하늘을 보고 팀원들과 사진 찍고 낄낄거리며 놀았다. 서로를 놀리고 장난치면서 두 시간쯤 재미있게 지냈다. 하산 후 멋진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뒤풀이를 했다. 나도 행복하고 팀원들도 행복해했다. 이곳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행복은 절대 돈만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밥을 먹고 있을까? 직장인들은 알짜배기 시간을 모두 조직에 내놓고 그 대가로 밥을 먹는다. 직업을 영어로 occupation이라 부르는데 차지한다는 의미의 occupy와 어원이 같다. 직장이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의미다. 자유를 잃고 구속을 당하지만 대신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곳이 직장이다. 프리랜서는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자유로운 대신 불안하다. 삐끗하면 생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 교수 생활을 할 때도 나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학교 일로 미팅도 있고, 강의도 있지만 그 외의 시간은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 시간을 주로 책 읽기, 글쓰기, 사람 만나기, 강의, 컨설팅, 코칭 등에 쓴다. 시간이 남으면 등산도 다니고 여행도 다닌다. 대기업을 나온 후 초기에는 자유보다는 일을 선택했다. 강의 청탁이 들어오면 기뻤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 것 같고, 강사료로 은행잔고가 느는 재미도 있었다. 강의 요청이 있으면 만사 제치고 강의에 응했다. 그러다 강의 요청이 뜸해지면 불안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돈보다 자유를 선호하게 되었다. 모든 강의에 응하기 보다 하고 싶은 강의만 했다. 기준은 재미, 보람, 투자 대비 효용성이 높은 것이다. 셋 중 하나는 있어야 강의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팔아 밥을 먹는다. 직장인은 입도선매로 시간을 내어놓은 사람이다. 프리랜서는 그때그때 시간을 판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 역시 시간을 팔아 밥을 먹는 사람이다. 그런 만큼 시간을 매우 중시한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날은 흐뭇하고 낭비한 날은 기분이 나쁘다. 내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감사하고 내 시간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화가 난다. 화 나게 하는 대표는 강의 청탁 후 취소다. 한참 시간을 남겨놓고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바로 전날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 매너가 아니다. 모 기업은 몇 달치 주말을 통째로 예약했다 바로 전날 취소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운동 약속도 못하고, 다른 기업 요청에도 응하지 못했는데… 이유도 모른 체 만나자는 요청은 두렵다. 어떻게 남의 시간을 이유도 말하지 않고 달라고 할 수 있는가? 밥을 먹자는 요청도 반갑지만은 않다. 한 번은 중소기업 대표의 요청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해외 출장인 자신을 대신해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사이라 기쁜 마음으로 응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그 분은 고맙다며 식사를 하자고 얘기했는데 당시는 몹시 시간에 쫓길 때였다. 이중으로 시간을 내어 달라는 요청에 더 이상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골프를 치자는 요청도 가끔은 곤혹스럽다. 그쪽에서는 성의를 갖고 좋은 마음에서 초청한 것이지만 기쁜 마음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미친 듯이 좋아했고 요청만 있으면 모든 일을 제치고 쳤지만 어느 시점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골프에 대한 흥미가 줄었다. 시간소모가 너무 큰 것도 이유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친해지는 일은 좋지만 그 때문에 하루를 통째로 날리는 것이 아까웠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갑작스런 일정변화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예전에는 일정변화를 싫어했다. 요즘은 아니다. 세상에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일정이란 가끔은 변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줄 취소나 변경 시 짜증을 내는 대신 이를 받아들이고 즐기기로 했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취소한 사람도 취소하고 싶어했을까, 뭔가 절박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주말 강의가 취소되니 주말이 통째로 내게 살아 돌아온 기분이다. 예전에는 스케줄이 빡빡해야 좋았다. 뭔가 제대로 일하는 것 같고, 사람 구실하는 것 같고, 유능해진 것 같았다. 지금은 빈 곳이 듬성듬성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이제는 채우는 대신 비우는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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