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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살아야 나라가 산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창의성 교육을 이야기할 때, 질문 못하는 우리 사회를 질타할 때 늘 유교식 교육의 폐해가 지적된다. 과연 그럴까. 공자의 교육방식은 ‘나를 따르라’였을까. 실제 ‹논어›를 읽어보면 그는 유능한 트레이너가 아니라 유익한 코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자는 한 줄 질문을 하고 제자들로 스스로 답변을 하게 끌어냈다. ‹논어›라는 책 제목 자체가 공자의 교육이념을 표방한다. ‹논어›는 스승인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집이다. 공자가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論)이고,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語)라고 한다. 공자는 제자의 입장, 질문이 이루어진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고 다양하게 대답해주고 있다.

공자는 제자들 각각의 개성과 성격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는 등 창의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코치였다. 공자에게는 대단한 제자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성격과 능력, 그리고 장단점이 각각 달랐다. 공자는 신분과 상관없이 열정과 노력으로 누구나 군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또 각자의 강점을 세밀히 관찰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자 했다.

敎(가르칠 교)는 아이(子·자)에게 새끼매듭 지우는 법(爻·효)을 회초리로 치며 가르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爻(효) 즉 새끼매듭(結繩·결승)은 문자가 출현하기 전 기억을 보조하던 주요 수단으로 당대 어린아이의 기본 교육과정이란 설과 점칠 때의 도구란 두가지 설이 있다. 일단 교재라고 이해하면 될 듯싶다. 아이에게 공부거리를 준 채 매를 들고 다그치는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깨우칠 회(誨)는 어머니가 회초리 대신 말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채찍으로 때려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깨쳐 밝히는 효(曉)의 의미이다. 교(敎)가 수직적 개념의 티칭이라면 회(誨)는 보다 수평적인 코칭의 개념이다. 교(敎)는 지식 등 무엇을 집어넣어 가르친다는 의미가 강하고, 회(誨)는 배우는 사람에게서 끌어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하고자 한 것은 ‘지식 주입’의 교(敎)가 아니라 언제 올바르고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는지 판단력을 주는 밝음의 깨우침의 효(曉)다.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공자는 가르칠 敎보다 깨우칠 회(誨)를 쓴다. 공자는 나는 “가르침에 싫증 내는 일이 없다”(회이불권 誨而不倦)에서 誨를 사용하고 있다. 가르침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enlight)이라고 공자는 생각했다. ‘교육하다’라는 의미의 educate도 어원은 ‘밖에서 집어넣다’가 아닌 ‘밖으로 끄집어내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공자의 인재교육의 키워드를 암시한다. 인(因)재(材)시(施)교(敎)라고 늘 제자의 특성에 따라 다른 방법을 썼다. 요즘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가 아니었다. 제자의 꿈, 처한 개인적 상황, 성격 등 모든 것을 고려해 한마디로 집어넣기보다 끌어내는 방식이었다. 각자의 강점, 꿈, 재능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교사라기보다 코치의 역할을 수행했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밑줄 좍, 별 세 개하며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매를 들고 다그치며 가르치지 않았다. 한 귀퉁이를 들어 나머지 세 귀퉁이를 알 때까지 기다렸고, 입에서 뱅글뱅글 돌고,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생각하며 분발하는 태도를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려 말 그대로 계발했다. 질문과 기다림으로 제자들의 성장을 이끌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의 본질, 회이불권의 코칭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는게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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