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는 내가 가진 오래된 습관이다. 난 언제 어디서나 메모를 한다. 술을 마실 때도, 걸을 때도, 신문을 볼 때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메모를 한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잡아두기 위해서다. 신문을 읽거나 지인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그렇다. 메모는 참 효용성이 높은 행위다. 한번은 단체로 엘지그룹 임원들과 자리를 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내 옆 자리에 지금은 돌아가신 구본무 회장님이 앉으셨다. 근데 어찌나 아는 것도 많고 재미난 얘기를 많이 하시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참석한 분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물었고 거기에 대한 답으로 난 회장님이 하신 말씀을 정리해 문자로 보내 사람들을 기쁘게 한 적이 있다. 모두 메모의 힘이다. 신문을 볼 때도 늘 메모를 한다. 의외로 멋진 말이나 새로운 정보가 많기 때문이다. 독서는 물론이다. 독서야말로 메모는 필수적이다. 무슨 책을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느냐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책에 재미를 못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독서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효과가 없어 자꾸 멀리한다. 보통 사람들은 독서하면 그냥 눈으로 보는 묵독을 떠올린다. 보는 비용 밖에 들지 않는다. 비용이 적게 드는 만큼 읽은 후 정보는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읽었지만 사실 읽은 게 아닐 수 있다.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내용을 물어보면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증거다. 내가 생각하는 효과적인 독서법 중 하나는 낭송과 필사다. 소리 내 읽고 읽으면서 혹은 읽은 후 메모를 하는 것이다. 난 좋은 대목이 있으면 소리 내어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책에 기록한다. 책을 읽은 후에는 반드시 그 책에 나온 내용을 기록한다. 사례, 좋은 구절, 속담, 격언 등도 기록한다. 느낌도 쓴다. 나중에 읽어보면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그 느낌을 그대로 맛볼 수 있다. 왜 낭송이 중요할까?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낭송은 느낌이 다르다. 같이 모여 있을 때 누군가가 낭송을 하고 나머지가 들으면 또 느낌이 새롭다. 난 팀장이나 임원강의 때 내가 쓴 원고를 복사해 돌아가면서 읽게 한다. 경청의 중요성 같은 것들이다. 그럼 파워포인트를 볼 때와는 완전 다른 느낌을 받는다. 같이 보면서 누군가 낭송하는 걸 듣는 건 신기한 경험이다. 내용이 영혼에 와서 박히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은 설명하기 어렵다.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낭송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년시절 나는 겐지 모노가타리와 마쿠라노 소오지를 읽었다. 낭송의 중요성에 대한 의미는 알지 못했다. 단지 말의 울림이라든가 문장의 어조를 읽고 있었다. 이 음독은 의미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던 것과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내 문장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소년시절의 노래 가락은 지금도 글을 쓸 때 내 마음 속에 들려온다.” 뜻도 모르고 읽었지만 그게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도 “나는 귀로 책을 읽었다. 글을 쓸 때도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썼고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처음에는 서툴렀던 글이 숙달되었다.”고 고백한다. 모두 낭송의 중요성을 안 것이다. 가장 좋은 독서법은 무엇일까?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 아닐까? 글을 쓴 후에도 소리 내어 읽으면 이상한 부분을 바로 발견할 수 있다. 글이 훨씬 정교해진다. 독서도 그렇다. 눈으로만 읽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소리 내어 읽으면 쓰기는 저절로 따라온다. 소리 내어 읽어야 하고, 읽으면서 써야 한다. 그게 참 독서다.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모택동이 한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법정스님도 읽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종교의 어떤 경전이든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그저 눈으로 스치지만 말고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울림에 신비한 기운이 스며 있어 그 경전을 말한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책을 가까이 하면서도 그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일지라도 거기에 얽매이면 자기 눈을 잃는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서도 콕 막힌 사람들이 더러 있다. 책을 통해 자신을 읽을 수 있을 때 세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책에 먹히지 말고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책에는 분명이 길이 있다” 낭송은 내가 말한 걸 내가 듣는 행위다. 눈, 입, 귀가 동시에 행동해야 가능하다. 필사는 거기에 손까지 필요하다. 종합훈련인 셈이다. 필사는 종이 위에 베껴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혼 속에 콘텐츠를 새겨 넣는 행위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kthan@assist.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