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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을 앞둔 어머니는 몇 해 전 65년을 함께 해로하신 아버지를 떠나보내셨다. 이후 나는 30년 가까이 서울과 해외를 떠돌며 잠깐씩 들렀던 제주 고향집을 베이스캠프로 삼기로 했다. 서울은 일을 위한 도시로 일을 마치면 바로 제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한 지 1년이 되었다. 누가 보면 굉장한 효녀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장례 이후 문득 어머니와 함께 할 시간도 훅 지나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와 의논도 없이 방 한 칸을 차지하며 시작된 철저히 나의 필요에 의한 동거가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노모와의 선물 같은 시간은 자극적인 막장드라마를 함께 보거나, 어머니표 집밥 레시피를 전수받거나, 텃밭을 채울 모종을 사러 오일장 구경 가는 등 소소하기 그지없는 일상이다. 가장 흥미로운 일상은 늘 띄엄띄엄 들어왔던 어머니의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경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이 안 오는 늦은 밤에 또는 마늘을 함께 까며 이야기는 밤이 깊은 줄 모르게 이어진다. 1931년 신미생으로서 대동아전쟁, 4.3사건, 6.25전쟁 등 대한민국 근대사를 관통해 온 평생의 이야기를 연대기별 대하드라마로 듣다 보면 미처 몰랐던 어머니의 새로운 면들을 알게 된다. 특히 누구의 아내도 아니고, 누구의 어머니도 아닌 오롯이 자신이었던 소녀 시절의 이야기들은 마치 타이타닉의 유물을 발굴하 듯 처연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어느 날의 대화는 순간 강점코칭 질문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그 전쟁통 다 겪어 내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6남매 낳아 잘 길러 내며 아버지와 65년 넘게 지내온 성공 비결을 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는 살면서 남들보다 빨리 배우는 게 어떤 거였어요?’ ‘그렇게 산전수전 겪는 동안 어떻게 내가 그 일을 해냈지? 생각나는 순간이 있었어요?’ ’65년 함께 살아본 아버지는 어떤 것을 특별히 잘하고 좋아한 것 같아요?’ 공감과 인정이 듬뿍 담긴 질문들은 34개 강점테마 도출을 위한 강점진단을 대신할 만큼 90세 노모에게는 강력했나 보다.

‘아이고.. 내 인생이 무슨 성공한 인생이라고.. 알아주니 고맙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뭐 어떻게 되겠지.. 다 이유가 있겠지.. 이런 담담한 마음이 되더라.. 큰일을 당할수록 더 담담해져.. 대동아전쟁 말기에 쏟아지는 폭탄을 피해 밭두렁 짚단 속에 몸을 피해 그 볏짚에서 며칠을 숨죽여 보낸 적이 있었어.. 그때도 살 사람은 살겠지 해지더라니까.. 반대로 네 이모는 같은 상황에서도 잘못되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항상 걱정부터 앞섰단다‘ ‘네 아버지는 정말 사람들을 좋아해서 밤 늦게 모시고 온 택시 기사분에게 자정 넘은 시간에도 밥상 차려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게다가 평생 공무원으로 지냈어도 재미지게 일했지.. 조금은 엉뚱하다 싶은 일도 자기가 해보고 싶은 건 어떻게든 사람들 모아 꼭 해보고 말더라니까’ 툭 던진 질문이 새벽까지 스토리가 이어진다. 풀어 놓는 에피소드들을 듣다 보면 묘하게도 나의 Top10 강점테마들 중 긍정(Positive), 행동(Activator), 발상(Ideation), 사교성(Woo) 등이 오버랩 된다. 아 부모님이 90여 년 살아낸 힘이 나의 강점으로 이렇게 이어져 있구나.

함께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 혼돈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최고로 발현되었던 부모님의 강점들이 나의 강점에도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믿음이 점점 깊어진다.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고 DNA에 새겨진 강점 유전자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생명의 성장사를 반 백년 지켜보며 크고 작은 고비마다 묵묵히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신 인생의 코치로서 나의 강점테마에 어찌 지분이 없었겠는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들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해 온 형제자매들과도 강점 질문들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 칼럼에 대한 회신은 yhy3131@gmail.com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