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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무릎을 다쳐 수술을 받았다. 퇴원하고 경과를 보러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회복이 잘 되고 있다며 한마디 덧붙이셨는데 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수술 상처가 예쁘게 아물었다는 거다. 무릎 밑으로 길고 굵게 난 흉터, 험상궂은 흉터를 분명 보면서 한 말이었다. 도대체 뭐가 예쁘다는 거지? 일단 정형외과에서 예쁘다는 말은 상식과는 완전 다른 의미인 걸로 정리!

우리가 가진 치유의 힘
나중에 집으로 문병 온 친구가 한 말은 다른 의미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친구는 나에게 다친 다리를 마음으로 보듬어봤냐고 물었다. 뼈가 부러지고 생살을 찢는 수술로 열어 철심을 박고 봉합하는 그 힘든 과정을 겪은 다리를 따스하게 감싸봤냐고, 케어 하는 마음으로 바라본 적 있냐고, 혹시 치료를 병원에만 맡겨 놓지 않았냐고 물어보는데 기가 막혔다. 내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크게 다쳤지만 치료는 남의 몫이었다. 치료는 의사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는 것! 내가 할 일은 좋은 병원과 의사를 찾아가는 게 다였다. 몸의 치료는 남에게 내맡겨 두고 내 정신은 온통 딴데 팔려 있었다. 하지 못하게 된 일, 어그러진 약속들, 가족 걱정, 병문안 온 사람들과 대화 등등… 그러느라 가여운 내 다리를 내가 돌볼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이 질문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다친 다리에 마음을 두었다. 따뜻한 두 손으로 상처부위를 감싸보았다. 차가웠다. 손의 온기를 전달해본다. 아기 상처를 돌보는 엄마처럼 정성껏 연고를 바르고 천천히 마사지를 했다. 진짜 소통이 필요한 대상은 다친 나의 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관심을 두고 소통한다고 생각하니 세포들의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아닌 것 같았다. 아직까지 흉터는 남아있지만 연고를 바를 때 나는 더 이상 다른 데 정신을 팔지 않는다. 희미해져가는 흉터 자국을 돌보는 데 집중이 된다. 

한 후배는 이런 얘길 들려주었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라서 아이들이 학교 마치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다니며 시간을 때우게 했었는데, 친한 친구가 돌봐 주겠다고 해 그 집에 맡겼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지만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아이 발에 피부질환이 있어서 몇 년 째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고 만성화된 상태였는데, 그 집에서 깨끗이 나았다는 거다. 물어보니,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 친구인 그이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다 정성껏 발을 씻겨주고 잘 말린 다음 연고를 꼼꼼히 바르기를 매일 했다고 한다. 관심과 정성이 치유의 힘이었다. 관심을 두는 데서 치유는 시작된다. 

코칭도 관심이 기초
내가 하는 일 중 하나는 리더들에게 코칭 방법을 교육하는 것이다. 구성원의 말을 어떻게 경청하고 목표를 공유하고, 어떤 질문을 던지고 피드백해주어야 효과적인지가 핵심이다. 거기서 나는 코칭 기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성원에 대한 관심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직원은 임원이 자신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읽은 걸 우연히 봤는데, 그게 감동이었고 어떤 얘기보다 자신을 귀히 대해준 태도에서 자기가 변화했다고 말한다. 담임 선생님이 관심을 쏟으면 학생이 엇나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한 관심을 갖는 게 쉬울까? 어렵다!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다. 정보가 넘쳐나고 주의 대상이 계속 늘어나서, 우리는 끊임없이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관심의 경제학(Attention Economy)’ 을 주창하는 토머스 데이븐포트(Davenport)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영어로 '관심을 쏟다(pay attention)'는 표현에 'pay(지불한다)’라는 동사를 쓰는 이유는 돈을 지불하 듯 관심도 지불해야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라고. 관심(attention)은 이제 점점 희귀해 지는 자원, 비즈니스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나의 희귀한 자원을 그와 나누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정이는 무엇으로 다송이를 휘어잡았을까? "
"기정이는 무엇으로 다송이를 휘어 잡았을까?" 영화 <기생충>에 대해 친구들과 나눈 얘기의 주제다. 누구도 통제를 못하던 천방지축 막내 다송이가 온통 가짜인 미술 선생님 기정과 수업을 몇 번 하고는 공손하게 두 손 모으고 배꼽 인사를 할 정도로 확 바뀐다. 영화에서 그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나와 친구들의 가설은 이랬다. 다송이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지만, 직접 하는 건 별로 없다. 과장하면 아이 키우는 걸 외주 서비스에 의지한다. 그래서 과외 선생님을 알아보고 갈아치우는 게 엄마로서의 일이다. 아이를 직접 보듬 지도 않고 혼내 지도 않고, 아이에게 쩔쩔맬 뿐이다. 반면 기정의 수업 장면은 전혀 다르다. 다송이를 자기 무릎에 딱 앉히고, 밀착해서 말하며 뭔가 몰입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만큼 진한 관심을 쏟았고 관심을 지불한 만큼 휘어잡은 것이 아니었을까? 관심과 케어의 파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설픈 해석이었다면 용서하시길. 그러나 다송이 엄마의 양육 방식은 다친 다리를 의료진의 처분에 맡겨만 놓고 정작 치유의 파워를 갖고 있는 관심과 케어는 줄 줄 몰랐던 나와 똑 닮았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kookmin.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