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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 불우한 시간이었다. 신촌 좁은 골목의 자취방에 돌아와서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일 때 유일한 위안은 이청준을 비롯한 뛰어난 한국 작가들의 소설이었다. 남루했던 마음을 단박에 잊게 만들어주던 소설들. 그때까지 가보지 못했던 장흥을 이청준의 고향이라 사랑했던 것 같다.

직장에 다니고 MBA 학생일 때는 자기개발과 경영혁신 책에 매료되었다. 스티븐 코비, 짐 콜린스, 피터 드러커, 톰 피터스 등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저술가들은,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업 경영이 열정을 가지고 헌신할 만한 멋진 세계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혁신과 경쟁, 자기 성찰,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는 기쁨이 거기 있었다. 나중에 경영학으로 학위를 한 것도, 리더십 전공을 택한 것도, 코칭의 길로 가게 된 것도 독서의 결과였던 것 같다. 

창의성은 소비에서 시작된다
<크리에이티브 커브>를 쓴 엘런 가넷은 창의성의 원칙을 소개했는데, 첫째 원칙이 ‘소비’다. 어느 분야에서 창의적이 된 사람들은 거기에서 왕성한 소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유튜브 스타들은 유튜브를 누구보다 열심히 많이 본 사람들이다. 넷플릭스의 컨텐츠 담당 부사장은 한때 비디오가게에서 일하면서 거기 있는 모든 영화를 보았다. 패셔니스타들은 알바를 해서라도 마음에 드는 옷과 신발에 투자를 해왔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왕성한 독서가들이다. 창조성이란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갑자기 떠올리는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오해하는데, 실은 소비와 축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린 자원이 있어야 창조가 있다는 거다. 한마디로, 쌓인 인풋에서 새로운 아웃풋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시간과 돈을 무엇에 투자하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가성비 최고의 투자
“신발 한 켤레 살 돈으로 위대한 사람의 한 평생을 살 수 있다.” 독서는 가성비 최고의 투자다. 직업이 독서가인 대만의 탕누어의 말이다. 요즘은 책을 안 읽는다고 한다. 영상 자료가 넘쳐나고 훨씬 쉽고 편리하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경험, 글의 전개를 따라가려고 애쓰면서 길러지는 사고력, 저자의 자잘한 센스들, 개성 넘치는 단어와 문장들, 머릿속 다른 지식과 결합되면서 연결되는 재미, 이런 것은 요약 영상으로는 얻기 어렵다. 이건 마치 인공지능 AI가 우리에게 딱 맞는 결과를 알려주어 편리하지만 우연한 실수에서 얻는 영감도, 자발적으로 궁리하면서 발견하는 재미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촘촘한 독서 커뮤니티를
코칭에도 독서가 유용하다. 코칭 고객의 이슈를 듣다 보면 그에게 도움이 될 책이 떠오른다. 그래서 책을 추천하는 일이 잦아졌다. 동료 코치들과도 책을 함께 읽고 싶다. 뭔가를 같이 읽는다는 것은 정신세계를 교류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어떤 기준과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코칭경영원이 해마다 개설하는 코치들의 SIG(Special Interest Group)가 있다. 올해에는 ‘북클럽’을 제안했다. 함께 읽고 토론하며 생각을 교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유발 하라리의 책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국민대 리더십과코칭 MBA 졸업생들에게도 독서 모임을 제안했다. 각자의 지식과 경험 위에 구축되는 영감을 나누며 성장해가는 커뮤니티가 되면 좋겠다. 가능하면 CEO들의 북 클럽도 만들고 싶고, 여성 리더들의 독서모임도 만들고 싶다. 

나는 우리 사회에 독서 클럽이 굉장히 많아지길 바란다. 엄마들의 독서클럽, 청년들의 북클럽, 동네 북클럽도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 층위에서 촘촘하게 지적인 네트워크와 커뮤니티로 쌓아 올려진 사회, 그 사회는 분명 건강하고 합리적일 것이다. 남을 욕하고 악플을 다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우아하고 지적이며, 세련된 문화를 지닐 것이다. 꿈이 너무 큰가? 

앞서 인용한 대만의 탕누어는 ‘전문성이란 바로, 모르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능력이다. 그런 안목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완전 공감한다. 이런 전문성은 시간의 예술, 축적의 결과이기 때문에, 각 분야에서 수십년 이어지는 공부모임을 꿈꿔보는 것이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kookmin.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