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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주업이고 기업 강의를 일년에 200회, 15년 이상 하고 있지만 난 늘 이런 식의 강의가 최선일까 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내노라 하는 강사들이 우글대고 그들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큰 비용을 지불하지만 그 효과성에 대해서는 늘 의문점을 갖고 있다. 강의의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강의의 목적은 행동 변화이다. 들을 때 아무리 사람들이 환호하고 재미있어 해도 행동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최선의 강의는 아니란 생각이다. 반대로 들을 때는 그저 그래도 들은 후 행동 변화로 이어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이 변한다면 그런 강의가 최선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필요할까?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가장 중요하다. 그게 없으면 강의 전달은 제대로 될 수 없다. 피터 드러커가 와서 강의를 해도 그저 그런 얘기로 들릴 것이다. 뭔가 절실하게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야 하고 그 문제가 늘 머릿속을 떠다녀야 한다. 목표달성이 될 수도 있고, 신제품 개발이 될 수도 있고, 기업문화를 변화시키는 아젠다가 될 수도 있고 상사와의 갈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책도 찾아보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여러 시도들을 하게 된다. 그러다 고민과 관련된 강의를 듣게 된다면 강의 효과는 만점일 것이다. 이는 책을 살 때도 그렇다. 난 늘 자존감과 자신감의 차이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중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쾌도난마 할 해법이 없었다. 그러다 대전역 책방에서 “자존감의 여섯 기둥”이란 책을 발견했다. 몇 장 뒤적이다 지체 없이 책을 사 단숨에 읽었다. 늘 관심이 있고 알고 싶었던 주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배움도 그렇고 변화도 그렇다. 깨달음이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앞이 환해지는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또 좋은 강의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행동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좋은 강의나 이야기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가수의 리사이틀을 쫓아다니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배우는 사람의 아픔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강연은 강의하는 사람만 고통스럽고 듣는 사람은 너무 편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일이란 “저 사람이 제대로 강의를 하는가”만 관찰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를 많이 쫓아다니면 행동 변화가 일어나는 대신 본인이 평론가로 변신하게 된다. 그야말로 강의만 많이 들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강의는 어떤 것일까? 듣는 사람이 아파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아픔은 바로 사전준비이다. 강의를 듣기 전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부서간 갈등 해소라는 주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럼 부서간 갈등이 뭔지? 이런 것이 왜 발생하는지? 이게 꼭 나쁜 것인지?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개인과 조직이 할 일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름의 생각과 의견이 나온다. 필요하다면 관련된 공부도 해야 한다. 이러한 사전준비를 거치고 강의를 들어야 한다. 강의도 일방적인 강의는 재미없다.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고 서로의 생각에 대한 논쟁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불꽃이 튄다. 그런 곳에서 참다운 학습이 일어나고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학습의 최대 장애물은 파워포인트이다. 파워포인트는 필요할 때 한 두 장 쓰면 충분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강의실의 주인공은 교수와 학생 대신 파워포인트가 되고 말았다. 가르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파워포인트만 본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주례가 주인공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주례사를 듣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닌데 정작 주인공 얘기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엉뚱한 주례 얘기만 잔뜩 듣고 올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아무런 지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미국 기업은 파워포인트를 점차 사용하지 않는 추세라고 한다. 

좋은 강의는 질문과 답변이 오가야 한다. 질문자와 답변자에 따라 강의를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최악의 강의는 강사가 질문하고 강사가 답하는 것이다. 학생이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지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최선의 강의는 학생이 질문하고 다른 학생이 답하는 것이다. 궁금한 것이 많기 때문에 질문이 많은 것이고 그 질문에 다른 학생이 답을 하면서 강의장은 활기를 띠게 된다. 이게 최선의 강의이다. 강사의 역할은 강의에 불을 붙이고 필요에 따라 정리정돈을 해주는 것이다. 

웨스트포인트의 테이모어 교육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사전에 읽을 과제가 엄청나다. 미리 고민을 해오라는 것이다. 학생이 읽어와 다른 학생을 가르치고 그들이 문제를 내고 그들이 푼다. 난 요즘 시험 삼아 강의를 듣는 사람이 적은 경우에는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사전 고민까지는 못해도 사람들을 둥글게 앉게 하고 관련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그들 스스로 답변하게 한다. 필요에 따라 내가 답변한다. 몇 번 해봤는데 반응이 꽤 괜찮다. 무엇보다 그들의 실제 생각과 고민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강의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생각하는 효과적인 강의의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No pain, no gain’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이다.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고민하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 칼럼에 대한 회신은 kthan@assist.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